[442.wiki]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감독-덜 유명한 형제

기사작성 : 2017-10-31 16:31

- 축구사에 획을 그은 감독과 그의 형제들
- 포포투가 가족 앨범을 뒤졌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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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편집팀]

섕클리와 채프먼, 히딩크, 그리고 퍼거슨. 단번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을 것이다. 축구계에서 찬양 받는 이름이니까. 그들에게도 혈육이 있다. 같은 분야에서 일했지만 덜 알려졌을 뿐이다. <포포투>가 그들의 가족 앨범을 뒤져봤다.

★마틴 퍼거슨(1942년생)
감독경력
워터퍼드 유나이티드, 이스트 스털링셔, 알비온 로버스

1982년, 친형 알렉스가 8년 전 이끌었던 이스트 스털링셔 감독이 됐다. 알렉스의 감독 경력에 도약대가 되어준 팀이었다. 알렉스는 재임기간 단 177일 만에 팀에 성공 의지를 심어놓았다. 스코틀랜드의 약체 팀에서 리그 승리를 이어가는 팀으로 변모했다. 이웃 클럽 폴커크를 70년 만에 누른 ‘역사적’ 승리도 포함된다. 알렉스는 곧 세인트 미렌의 감독직을 제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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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은 잘 풀리지 않았다. 스털링셔는 그의 두 번째 팀이었다. 1967년 25세 나이로 워터퍼드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데뷔했지만 클럽 회장과 불화로 FA컵 결승 직전 지휘봉을 놓았다. 스털링셔에서 다시 감독직을 맡기까지 13년이나 걸렸다. 형 알렉스가 애버딘과 스코틀랜드 리그 첫 우승을 차지하기 직전이었다. 흥미로운 건 생업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 용접봉을 판매하는 일과 감독직을 병행했다. 당연히(?) 첫 시즌 팀의 3부리그 강등도 막지 못했다. 그는 스털링셔가 강등된 후 소위 ‘스타’ 행세를 하는 선수 7명을 내쫓았다.

알렉스의 족적을 따르고 싶었을까? 마틴의 답이다. “나는 이 일을 돈벌이가 아닌 취미로 한다. 알렉스가 축구에 얼마나 전념하는지 안다. 나도 그래야 할 거다. 그러려면 제대로 된 클럽에서 일해야 한다.” 이스트 스털링셔는 3부에서 우울하게 시즌을 시작했다. 마틴은 알비온 로버스의 지휘봉을 넘겨받으며 팀을 떠났다. 그곳에서도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사이 퍼거슨은 애버딘을 이끌고 레알 마드리드를 누르며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차지했다. 마틴은 다시는 팀을 맡지 못했다.

알렉스가 199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자리를 옮기기 전 마틴은 세인트 미렌과 히버니언에서 유럽 담당 스카우트를 맡아 함께 성공을 맛봤다. 뤼트 판 니스텔로이와 야프 스탐 같은 선수 영입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2013년 축구계에서 완전히 떠났다. 그 시즌이 끝나고 알렉스가 깜짝 은퇴를 선언한 건 우연의 일치였다. “내 은퇴를 취재하기 위해 각종 언론과 방송사가 줄을 섰다. 형이 은퇴하는 바람에 모두 망쳤다!” 그는 마지막까지 형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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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히딩크(1955년생)
감독 경력
AD’69, 신트 요리스, VVG’25

르네 히딩크 역시 형 거스처럼 축구감독의 운명을 타고난 듯했다. 물론 행보에는 차이가 있었다. 르네는 네덜란드 작은 클럽 AD’69와 신트 요리스, VVG’25를 지휘했다. 반면 거스는 1998년과 2002년 월드컵에서 각각 네덜란드와 한국을 4강에 올려놓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레알 마드리드와 발렌시아, PSV, 첼시(2회) 등 유럽 빅클럽까지 거쳤다.

르네는 거스만큼 야심 찬 지도자는 아니었다. 아마추어 클럽 외에 1, 2부를 오가는 데 그라프샤프와 2부리그의 도르드레흐트 코치로 일하기도 했다. 시간제로 축구 관련 일을 하면서 가족 사업인 ‘히딩크 스포츠 매니지먼트’에도 관여했다. 르네는 2006년 한 인터뷰에서 “최근 한국의 대형 피자 체인 광고를 찍었다”고 자랑했다.

2011년에는 아미 파트리오티크 르완다 FC 감독직을 제의 받았다. 르네는 거스와 의논한 후 수락했다. “대단한 한해였다. 리그와 컵 더블을 이뤘다.” 그의 회상이다. 르네는 아프리카에서 승리를 이어가는 중에도 종종 병영으로 불려갔다. 이유는 이렇다. “경기에 지면 장성들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우린 ‘걱정마십시오, 장군님’이라고 말하곤 했다. 다행히 자주 패하진 않았다.”

이후 르네는 아프리카를 누볐다. 레드불 가나 유소년팀 감독을 맡았고, 에티오피아 1부 세인트 조지FC에서 유소년 아카데미를 책임지기도 했다. 두 클럽에서 그리 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자기 형에게 익숙한 ‘국제적’ 경험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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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채프먼(1880년생)
감독 경력
헐 시티

해리 채프먼은 현역 시절 형 허버트보다 더 뛰어난 선수였다. 비극적으로 짧게 끝나지만 않았다면 지도자 경력도 형을 뛰어넘었을지 모른다. 둘은 셰필드 더비를 함께 소화했다. 해리가 셰필드 웬즈데이에 입단했고, 허버트는 노샘프턴에서 뛰다가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옮겼다. 1902년 9월 셰필드 더비에서 둘은 격돌했다. 허버트의 유나이티드 데뷔전이기도 했던 이날 경기에서는 해리의 웬즈데이가 3-2로 승리했다. 점차 해리의 명성이 허버트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언론이 허버트를 “셰필드 웬즈데이 해리 체프먼의 형”이라고 보도하는 쪽이 익숙할 정도였다.

해리는 1902-03시즌 12골을 터뜨리며 웬즈데이의 첫 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다음 시즌에도 리그 17골을 기록하며 2연패를 이끌었다. 해리는 웬즈데이에서만 298경기에 출전해 99골을 넣었다. 당시 언론은 그를 “인기가 좋고 영리한 선수”, “부지런히 움직이는 선수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고 소개했다. 1907년 FA컵 결승에서 우승을 이끌었던 순간은 선수 생활의 정점이었다.

해리가 FA컵을 품에 안은 며칠 뒤 허버트는 노샘프턴의 선수 겸 감독이 됐다. 해리는 1911년까지 웬즈데이에서 활약하다 2부 헐 시티로 자리를 옮겼다. 헐의 유망주들에게 경험을 전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불행히도 두 번째 시즌이었던 1912년 9월 열린 시즌 첫 경기에서 무릎 골절을 당했다. 해리는 해부학을 공부했던 터라 선수 경력이 끝난다는 걸 직감했다. 그가 없는 헐은 리그 밑바닥을 헤맸다. 앞날이 암담해 보이던 팀의 지휘봉을 해리가 잡았다. 그는 헐을 중위권으로 이끄는 지도력을 선보였다.

해리는 1913-14시즌을 앞두고 헐을 승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리즈 시티를 이끌던 허버트도 같은 목표를 세웠다. 형제는 그 시즌 세 차례 맞대결 했다. 모두 해리의 승리로 끝났다. <요크셔 포스트>는 “(헐의)전술은 리즈 선수들이 자신들의 플레이를 펼치지 못하게 하거나 어쩔 수 없는 약점을 노출하게 했다”고 보도했다. 해리가 허버트만큼, 혹은 더 전술적으로 우수했을까? 안타깝게도 축구계는 이 질문의 답을 알지 못한다.

1914년 해리는 한 시즌 만에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몸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졌다. 병명은 폐결핵. 당시만 해도 치료법이 없었다. 병든 해리는 2년 후 아내 미란다와 사별하자 허버트와 함께 지내기 위해 리즈로 향했다. 1916년 4월 해리는 36세로 허버트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이제 해리는 거의 잊혔지만 허버트는 축구의 현대화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허버트는 축구 전술과 훈련법을 혁신했다. 축구장 조명과 등번호 등 새로운 문물도 도입했다. 허더즈필드에서 리그(2회), FA컵(1회) 정상에 올랐고, 아스널에서 영광스러운 역사를 썼다. 그렇지만 허버트도 하이버리에서 9년을 보낸 뒤 병마에 굴복했다. “해리 채프먼의 형”은 1934년 1월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5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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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봅 섕클리(1910년생)
감독 경력
폴커크, 서드 라나크, 던디, 히버니언, 스털링 알비온

섕클리라는 이름을 대면 대다수 축구팬들은 60~70년대 초반 리버풀을 영광으로 이끌었던 남자를 떠올릴 것이다. 콥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뻗은 팔과 전설적인 ‘생과 사’ 어록도 빠질 수 없다. 그렇지만 던디에서만큼은 이야기가 다르다. 많은 던디 팬들에게 섕클리는 곧 봅을 뜻한다.

봅은 빌의 세 살 형이다. 1961-62시즌 던디에 최초이자 유일한 스코틀랜드 풋볼리그 우승을 안긴 남자다. 다음 시즌 그는 던디를 유러피언컵 준결승으로 이끌었다. 빌의 리버풀이 같은 무대를 밟기 두 해 전이었다. 봅은 셀틱을 유러피언컵 정상으로 이끈 지도자 조크 스타인의 존경을 받았다. 빌의 지도자 생활에도 멘토 역할을 했다는 것이 측근의 전언이다. “둘은 매주 축구에 관한 통화를 했다. 리버풀의 스타일은 봅의 숏패스 철학과 매우 유사했다. 봅이 잉글랜드에서 활동했다면 맷 버스비의 업적을 재현했을 거다.”

봅과 빌 모두 지도자 초기 경력은 변변치 않았다. 빌은 1949년 칼라일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후 그림즈비와 워킹턴을 거쳐 1956년 허더즈필드 지휘봉을 잡았다. 봅은 1950년부터 7년 간 폴커크를 지휘했다. 자신이 만든 팀이 스코티시컵을 차지하기 직전 팀을 떠났다. 서드 라나크에서도 비슷했다. 스코틀랜드컵 결승에 진출했던 1959년 섕클리는 떠났다.

던디에서는 최초의 리그 우승컵을 안겼다. 1963년에는 유러피언컵에 출전해 쾰른과 스포르팅, 안더레흐트를 차례로 물리쳤다. 준결승에서 밀란에 아쉽게 패하지 않았다면, 영국 클럽 최초로 유러피언컵 우승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 축구 저술가 봅 크램시는 이렇게 평했다. “세계대전 이후 스코틀랜드 축구가 배출한 최고의 팀이었다.” 던디는 1964년에도 스코틀랜드컵 결승에 진출했다. 레인저스에 패했지만 국내 3개 대회에서 100골을 터뜨리는 화력을 뽐냈다. 섕클리와 함께한 던디의 절정기였다. 1965년 2월 히버니언으로 옮긴 뒤에도 인상적인 지도력을 선보였다. 이후 2부 스털링 알비온을 끝으로 지도자 생활을 마감했다.

봅은 열정이 넘치는 동생에 비해 훨씬 내성적이었다. 그렇지만 상대에 겁을 주기 위해 자기 팀의 강점을 떠벌리는 과장법은 닮았다. 두뇌 회전이 빨랐던 점도 비슷했다. 측근 알렉스 스미스는 “기회가 있었다면 그도 잉글랜드에 진출했을 것”이라며 “잉글랜드 클럽들은 잉글랜드 리그를 먼저 경험한 지도자를 원했다. 맷 버스비처럼 빌도 그렇게 선택받았다. 하지만 봅은 경험이 없었다”고 말했다. 훌륭한 지도자를 찾기 위해 북쪽으로 눈을 돌린 잉글랜드 클럽이 있었다면, 봅도 지금쯤 동생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존경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던디 홈경기장 스탠드는 섕클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사진=포포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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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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