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wiki] 동독 축구의 비밀스러운 역사

기사작성 : 2018-04-30 17:07

-최강 독일도 분단국으로 축구 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4월드컵 음모론, 선수 사찰, 의문사까지...
-장막 너머 동독에서 벌어진 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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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Uli Hesse]

세계 정상의 독일 축구도 동과 서로 갈라진 시절이 있었다. 서방의 사람들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말하기 좋아했다. 장막 뒤에 가려진 실체(동독)에 관한 ‘썰’만 무성했다.

동독 축구가 다시 주목받은 건 최근 2, 3년 사이다. RB라이프치히의 돌풍이 역사를 환기시켰다. <포포투>가 동독 축구의 비밀스럽고 어두웠던 시간을 추적했다. 놀라지 마시라. 축구팀 운영에 철학도 없고 팀 선택의 자유도 없던 시절이었다. 선수 사찰도 일상이었다. 의문사까지 등장한다. 물론 그 끝은 재건으로 완결 나는 해피엔딩이다.

# 동독 축구를 둘러싼 음모론
혹자는 1974년 월드컵의 음모론을 주장한다. 조별리그 1라운드에서 서독 선수들이 의도적으로 동독 선수들에게 패했다는 주장이다. 2라운드에서 쉬운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스-위르겐 크라이셰는(70)는 “완전히 헛소리”라고 일갈했다. 크라이셰는 1970년대 플레이메이커로 뛰며 득점력가지 갖췄던 동독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한 명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는 잠시 고향 클럽인 디나모 드레스덴을 지휘했고, 이후에는 유망주를 정확히 집어내는 탁월한 안목으로 명성을 쌓았다. 세 시즌 전까지는 RB 라이프치히의 스카우트를 책임졌다.

크레이셰는 프란츠 베켄바워와 제프 마이어, 게르트 뮐러가 뛰던 서독을 상대로 거둔 전설적인 1-0 승리를 회상하며 “사실 서독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가 우리가 진다고 예상했다”고 인정했다. “대회 관계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분발할 이유가 될 뿐이었다. 동독의 많은 지역에서 서독 축구를 칭송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드레스덴에서는 서독 TV방송을 볼 수 없었지만 베를린이나 마그데부르크, 예나 사람들은 늘 분데스리가를 봤다. 유럽 무대에서 자주 실력을 증명해도 우리도 꽤 괜찮게 축구를 한다는 걸 몰랐다.”

과장이 아니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을 앞두고 유러피언컵에 출전한 크레이셰의 디나모 드레스덴은 유벤투스를 탈락시켰다. 최종 우승팀인 바이에른 뮌헨도 벼랑 끝까지 몰아갔다. UEFA컵에서는 로모코티브 라이프치히가 토리노와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입스위치를 꺾으며 준결승에 올라 토트넘에 패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월드컵이 개막되기 5주 전에는 마그데부르크가 밀란을 누르고 컵위너스컵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동독 클럽의 유럽 대회 우승이 한 번뿐이라며 이 나라의 선수들까지 깎아내리곤 한다. 큰 오해다. 사실 동독 팀들은 축구를 하찮게 여기는 국가에서 놀라운 성과를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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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셰는 “가장 큰 문제는 서방 세계처럼 축구가 대단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거였다”라고 정리했다. 물론 고위직 당 간부들을 뜻한다. 동독의 체육부 장관으로 도핑 시스템을 조종해 악명 높은 만프레드 에발트가 그 정점이었다. “우스울 정도로 메달에 집착한 에발트는 축구를 구석에 박아 놓았다”고 말하는 크레이셰의 목소리에서는 지금도 비통함이 묻어났다. “올림픽이나 세계 대회에서 메달을 기대할 수 있는 종목이 너무나 많았다. 에발트는 축구를 보고 ‘이 친구들은 왜 배구나 핸드볼팀처럼 세계 정상급이 안 되지?’라고 물었고, 우리더러 배구 선수들처럼 훈련하라고 했다. 끔찍했다.”

# 정부 통제: 동독 축구 쇠락으로
축구에 대한 지원만 끊긴 게 아니었다. 유치원 아이들을 검사하는 전문 의료진이 다른 스포츠를 권하면서 유망주들까지 빼앗겼다. 미하엘 발락에게 스피드 스케이팅을 시키려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가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통에 부모님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부의 간섭은 동독이라는 국가의 탄생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동서독의 모든 스포츠클럽이 해체되었다. 스포츠클럽이 반민주적 성향의 독일인들을 길러내는 바탕이라고 연합국이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독에서는 곧 옛 클럽의 재창단이 허용된 반면 동독에는 ‘베트리브스포르트게마인샤프텐(관영기업 산하 체육조직)’라는 체계가 생겼다. 로코모티브(철도 노동자)나 디나모(경찰)처럼 특정 직종이나 직업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크라이셰는 이 제도의 경직성을 절감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 이전과 전쟁 중에 SC 드레스덴에서 뛰었다. 당시 감독은 헬무트 쇤(1964~1978년 서독 대표팀 감독)이었다. 1945년 말 전쟁이 끝나자 예전 선수들과 구성원들이 SG 드레스덴-프리드리히슈타트로 이름이 바뀐 팀에 다시 모였다. 그들은 리그 평균 관중의 세 배 가까이를 기록하는 인기팀이었다. 동독리그가 처음 시작된 1949-50시즌에는 최종일까지 츠비카우와 승점 동률을 이루며 우승을 다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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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리드리히슈타트가 동독에서는 “부르주아 클럽”으로 받아들여지는 옛 전통을 이으려는 조짐을 보이자 권력이 이들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여러 경기에서 추악한 음모의 조짐이 비쳤다. 프리드리히슈타트와 츠비카우가 맞붙은 시즌 최종전에는 팀의 우승을 자축하려는 드레스덴 팬들이 6만 명 가까이 운집했다. 그들은 츠비카우가 5-0으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프리드리히슈타트가 우승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한 관중이 폭동을 일으켰다. 부정행위가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그날 경기장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심판 판정이 편파적이었다고 증언했다.

크라이셰는 담담하게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고 말한다. “그때 헬무트 쇤과 우리 아버지는 동유럽에 미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둘은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서독으로 이사했다.” 쇤은 서쪽에 남았고, 결국 1966년과 1974년 서독을 월드컵 정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웠던 크라이셰 가족은 1954년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며 동독이 완전히 고립되기 7년 전이었다.

한스-위르겐 크라이셰는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선수로 꽃을 피웠다. 1965년 동독 18세 이하 팀의 일원으로 그는 UEFA 청소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장비가 삼엄한 국경을 건너 서독으로 갔다. 인구 1,600만 명의 동독에 훌륭한 재능이 많다는 걸 증명한 대회였다. 동독은 결승에서 피터 오스굿이 뛰는 잉글랜드를 3-2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크라이셰는 결승골을 기록했다.

# 동독 리그: 빈번한 연고이전, 자유이적권 부재, 선수 사찰까지
그렇지만 클럽 축구는 여전히 고전했다. 경기 수준을 끌어올린다며 엉뚱한 곳에 힘을 쏟아 되려 혼란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선수들에게 소속팀을 떠나 더 나은 팀에서 뛰라는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아예 선수 전원이 다른 팀으로 옮겨가는 일도 있었다. 1953년에는 겨우 2년 전 만들어진 포어베르츠 라이프치히를 수도로 이전시켜 포어베르츠 베를린으로 만들었다. 1971년에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이름이 포어베르츠 프랑크푸르트로 바뀌었다.

철학 없는 땜질식 처방은 1963-64시즌 극에 달했다. 라이프치히의 두 클럽이 병합되어 SC 라이프치히가 되었고, 이 도시의 또 다른 클럽인 케미에서 우수 선수들이 차출되었다. 이후 할리우드산 최루성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신생 슈퍼클럽 SC 라이프치히는 3위에 그쳤다. 쓸모없는 선수라 거부당한 이들이 모인 케미가 우승컵을 안았다.

케미의 저항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0여 년 후 라이프치히의 조각가 군터 슈만은 나무로 축구 선수 몇 명의 거대한 조각을 만들어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최고 클럽이었던 로코모티브의 팀컬러였다. 고집이 세기로 유명했던 슈만은 조각에 케미의 초록색과 흰색을 칠했다. 현재 이 작품은 콘크리트로 바뀌어 케미의 홈구장 알프레도-쿤체-스포르트파크의 메인스탠드 옆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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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미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리그 정상에 선 1년 뒤, 자본주의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팀을 길러내기 위한 결연한 시도가 시작됐다. 당은 수준이 더 높은 리그에서는 팀이 모(母) 스포츠클럽과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며 팀을 축구만을 위한 조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로스토크에서는 수영과 육상까지 아우르는 종합 스포츠클럽 엠포르 로스토크의 축구팀이 개별 조직이 되었다. 위원회는 한때 한자 동맹이라 알려진 도시 동맹의 일원이었던 로스토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이름을 공모했다. 정확히 126건이 모였는데 대부분은 새로운 팀을 한자라 부르고 싶어 했다. 칼마르크스슈타트(지금의 켐니츠)와 마그데부르크, 할레, 콧부스, 에어푸르트 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 동독에 속했던 지역의 수많은 클럽이 지난해 동시에 50주년을 축하했던 이유다.

이러한 결정은 크라이셰의 디나모 드레스덴에는 끝을 의미했다. ‘드레스덴 FC'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1965년 11월 신생 클럽을 책임질 회장과 부회장, 총무까지 내정되었다. 그렇지만 먼저 당시 비밀경찰의 수장으로 강력한 힘을 지녔던 에리히 밀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밀케는 서류에 붉은 펜으로 “무효”라 휘갈겨 쓴 뒤 드레스덴의 팀은 “디나모로 남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디나모 드레스덴은 그에게 유용한 존재였다. 미켈의 우선순위는 베를린에 더 큰 디나모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드레스덴의 클럽이 선수를 공급해야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선수들은 자신들이 어느 팀을 위해 뛰어야 할지 통보된다는 소식에 끔찍해 했다. 올해의 선수상을 세 번이나 받은 골키퍼 위르겐 크로이는 정기적으로 고향의 하찮은 팀 츠비카우로 이적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보통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치는 팀에서는 골키퍼가 발전할 수 없다고 축구협회 임원들을 설득하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선수들은 당이 그들의 삶을 조종하는 방법이 하나뿐이 아니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동독 국민이라면 어디에나 비밀경찰 슈타지의 스파이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슈타지가 상상도 못할 수준까지 국민을 사찰했던 기록들이 공개되고 수많은 고발자의 정체가 까발려진 것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였다. 크라이셰는 “디나모는 경찰 클럽이었다. 그만큼 슈타지 정보원들의 잠입이 많았다”라고 설명했다. “기록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이 한때 친구라 생각했던 팀 동료들이 자신의 모든 언행을 슈타지에게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 1974년의 진실은…
이제 드디어 위스키로 돌아가 보자. 1974년 월드컵에서 동서독이 맞붙은 이틀 뒤, 동독 대표팀은 2라운드를 위해 뒤셀도르프 근처의 훈련캠프로 향했다. 크라이셰는 비행기에서 함부르크에서 왔다는 42세 축구 팬 옆에 앉게 되었다. 그는 서독의 경기력이 형편없다며 그들이 절대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할 거라 주장했다. 크라이셰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내게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냥 둘이 축구 이야기를 좀 했는데, 나는 결국 홈어드밴티지 때문에 서독이 우승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자 낯선 이는 크라이셰의 예측이 맞는다면 그에게 ‘블랙앤화이트 위스키’(스코틀랜드의 유명 위스키 상표명) 5병을 보내겠다고 했다. 2주일 뒤 서독이 월드컵 정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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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연한 만남이 크라이셰에게는 문제의 발단이었다. 비행기에서 만났던 남자가 바로 당시 서독의 재무장관 한스 아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말을 지켰다. 크라이셰는 “디나모에서 새 시즌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회장실에서 나를 불렀다”고 기억했다. “탁자에 상자 하나와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내게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렇지만 당연히 대답할 수 없었다.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내게 편지를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깜짝 놀랐다.” 잘 쓰인 편지였다. 그렇지만 적국 고위 관료가 보낸 편지는 크라이셰에게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아펠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란다”고 끝을 맺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동독 대표팀은 2년 뒤 몬트리올에서 열린 금메달 결정전에서 폴란드를 3-1로 꺾으며 38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그렇지만 주축 한 명이 빠진 자리가 눈에 띄었다. 대회 직전 국내 리그에서 네 번째 득점왕이 된 한스-위르겐 크라이셰였다. 그는 “왜 나를 부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드레스덴 동료 6명이 캐나다에 갔다. 어떠한 이유도 댈 수 없었다. 그냥 일이 그렇게 됐고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아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안다.”

동독 정부는 크라이셰가 국제대회를 이용해 조국을 버리지 않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많은 축구선수들이 동독을 탈출할 방법을 찾았다. 1976년 11월에는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21세 대회에 출전했던 두 유망주 노르베르트 나흐바이와 위르겐 팔이 망명했다. 1979년 3월에는 디나모 베를린의 22세 미드필더 루츠 아이겐도르프가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열린 친선경기 후 무단이탈해 동독 축구역사에서 가장 기이하고 비극적인 사연의 주인공이 됐다.

소문에 따르면, 밀케는 디나모 선수의 배신 소식에 격노했다고 한다. 그는 복수를 원했다. 그는 먼저 아이겐도르프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가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특수 요원들을 파견했다. 그들은 가브리엘레 아이겐도르프를 유혹해 남편과 사이가 벌어지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로미오’라는 암호로 불린 전문가 중 한 명이 임무에 성공해 가브리엘레는 남편과 이혼했고, 결국 그 특수요원과 결혼했다. 그다음 미켈은 서독에 있는 아이겐도르프를 미행하기 위해 공작요원 50명을 보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동독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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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3월 첫 번째 주, 당시 분데스리가의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뛰던 아이겐도르프는 자동차 사고로 삶을 마감했다. 처음에는 음주운전 사고로 알려졌다. 그러나 평소에 술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의혹이 남았다. 독일 통일 이후 수많은 문서가 공개되었고, 단순한 의혹을 뛰어넘는 증거들이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대가를 치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아이겐도르프의 죽음 뒤에는 동독 비밀경찰이 있었다.

크라이셰는 “내가 이 나라를 떠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털어놓았다. “맞다, 루츠 아이겐도르프처럼 눈에 띄는 건도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라를 떠나면 자동으로 1년간 자격이 정지되었다. 축구선수에게는 긴 시간이다. 어쨌든 우리 삶은 나쁘지 않았다.” 축구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이셰는 1978년 축구화를 벗은 뒤 지도자 자격을 따고 디나모 드레스덴의 유소년 팀에 합류했다. 언젠가는 1군도 지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동독 축구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에발트나 공화국의 다른 정치 거물들은 축구에 관심을 완전히 접었다. 그라운드는 고스란히 밀케의 손으로 넘어갔다. 1970년대 말까지는 드레스덴과 마그데부르크가 리그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밀케의 총애를 받는 디나모 베를린이 리그 10연패로 독주하는 초대형 괴물이 되었다.

# ‘동독 괴물’ 디나모 베를린
팬과 선수들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심판들이 베를린의 편이기 때문에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로크 라이프치히에서 뛰었던 우베 브레도브는 언젠가 “그들과 경기를 할 때면 주심이 미심쩍은 페널티킥을 하나 줄 거라고 예상했다”고 회상했다. 밀케의 팀은 이 나라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팀이었다. 경기 때면 날카롭고 적대적인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이런 배경에서 또다시 악명 높은 경기가 나왔다. 1986년 3월 디나모 베를린이 로크 라이프치히를 찾아왔다. 경기 초반 홈팀이 올라프 마르샬의 골로 앞섰다. 막바지에 이르러 라이프치히의 한 선수가 미심쩍은 레드카드를 받았다. 심판은 추가시간 5분을 선언했고, 막판에는 베를린에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페널티킥을 선사했다. 편파판정을 언급하지 않으려고 평소 피나게 노력하던 TV중계진조차 “대단히 논란이 많은” 판정이로 평했을 정도였다. 관중석은 폭동 일보 직전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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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후 라이프치히의 한 임원은 용감한 발언을 남겼다. 유명 무역박람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외국 방문객들이 어떤 조작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하도록” 디나모가 로크와 경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엄청난 논란 끝에 주심이 징계를 받았다.

그렇지만 반전이 있다. 14년이 지나 디나모 베를린이 통합 독일리그 체계의 4부로 강등된 후 이날 경기의 오래된 비디오가 발견됐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찍힌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면 로크의 수비수가 교묘하게 디나모의 스트라이커 등을 민다. 동독 축구 팬들에게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진 수치스러운 페널티킥”은 사실 옳은 판정이었다.

동독 축구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디나모 베를린이 통일 후 고전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옛 슈타지 클럽은 너무도 미움을 산 탓에 몇 년간 베를린 FC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지만, 과거를 지우려는 노력은 효과를 전혀 보지 못했다. 다른 동독 클럽들도 빠르게 몰락해 제3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고 몇 달 뒤인 1991년 여름, 동독 1부 두 클럽이 분데스리가에 합류했다. 6개 클럽은 2부에 편입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축하하던 2014년 11월, 1부에는 동독 클럽이 단 한 팀도 남아있지 않았다. 2부에서도 우니온 베를린이 유일했다.

# 동독 축구, 뿌리부터 재건
동독 클럽들의 문제는 사실 통일 전부터 시작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6일 만에 열린 동독 대표팀 경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날아온 스카우트 100여 명이 모였다. 사진기자용 취재증을 목에 건 바이어 레버쿠젠의 대리인은 동독 대표팀의 벤치에 앉아 경기 중 선수들과 계약을 논의했다. 동독 팀들이 자본주의의 생리를 배우기도 전부터 어떤 공격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순진한 일 처리도 한몫을 했다. 당시 디나모 드레스덴과 대표팀을 동시에 지휘했던 에두아르드 가이어는 이후 “우리는 자신을 탓해야 한다. 깜냥이 안 되는 지도자, 관리자를 영입하고는 서방에서 온 그들이 구세주가 되어줄 거라고 착각했다. 그 엉터리들이 우리를 더 깊은 물 속으로 처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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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들이 제어할 수 없는 요소도 있었다. 딱 하나를 꼽자면 경제력이다.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독일 기업 30걸 중 동독 기업은 하나도 없다. 독일의 대기업 1만3000개 중 동독 연고 기업은 1400개에 불과하다. 동부의 경제력이 여전히 서부의 30%에 미치지 못한다. 스폰서가 부족해 다른 종목도 타격을 입었다. 인구 문제도 있다. 1989년부터 2012년까지 동독인 185만 명이 고향을 떠났다. 대부분은 직업과 미래를 찾아 나선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서부 대도시에 정착해 동독 억양을 고쳐가며 서독에 적응했다.

그렇지만 이제 상황이 변하고 있다. 그라운드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단순히 RB 라이프치히의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레드불의 자금을 끌어들인 이 클럽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동독의 뿌리를 잃어버린 기성품이라 한다. RB가 컵대회에서 디나모 드레스덴과 맞붙었을 때는 관중석에서 황소 머리가 하나 날아들었다.

변화의 더 나은 사례는 드레스덴 자체다. 2016년 3월 드레스덴은 4반세기 만에 부채가 없어졌다고 밝혔다. 두 달 뒤에는 동부의 오랜 라이벌 아우에와 함께 2부로 승격했다. 건전한 재정을 자랑하는 마그데부르크와 할레가 상승세를 이어가는 3부 풍경은 더욱 인상적이다.

모든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동독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의 자부심을 재발견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2012년의 한 시점을 기준으로 이탈 현상이 멈추었다. 통일 이후 처음으로 이 지역의 유출보다 유입 인구가 많아졌다.

한스-위르겐 크라이셰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3년 전부터 옛 클럽 디나모 드레스덴의 스카우트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동부의 많은 사람들처럼 신중하게 낙관론을 편다. 그는 한 신문 인터뷰에서 “2부에서 2, 3년간 자리를 지킨 후에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정상이다.”


사진=포포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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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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