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wiki] ‘여자 축구를 금하라!’ 잉글랜드 축구 비사

기사작성 : 2018-06-04 15:29

- 여자 축구 성공에 배가 아팠다?
- 종주국 잉글랜드의 여자축구 암흑기
- 최초의 흥행팀, 딕 커스 레이디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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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Carrie Dunn]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을 자처한다. 여자 축구도 잉글랜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꽤 오랜 역사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진보’로만 채워진 건 아니다. 암흑기도 있었다. 1921년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여자 축구 금지령’을 내렸다. 축구는 여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무려 50년 동안 잉글랜드에서는 여자 축구를 합법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을 추적했다.

여자 축구 성공에 자극받은 축구협회?
1921년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여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축구를 금지했다. 이 상태가 1971년까지 지속했다. 여성은 50년 동안 경기할 방법을 찾았지만, 축구는 절대 회복되지 않았다.

12세 소녀가 버스에 앉아있다. 축구 경기 때문에 부모와 함께 프레스콧에서 맨체스터로 가는 길이었다. 관전이 아니라 직접 출전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지금은 그렇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의 축구는 엄격하게 금지됐다. 다름 아닌 잉글랜드축구협회의 조치였다.

12세 소녀의 이름은 실비아 고어. 그녀는 늘 축구가 좋았다. 어릴 때는 전 세계의 수백만 어린이들처럼 아버지, 삼촌과 함께 공을 차며 기술을 배웠다. <포포투>는 2016년 5월 그녀를 만난 적 있다. “우리 동네 팀은 프레스콧 케이블스였다. 그들은 하프타임에 나를 찾곤 해서 골대에다가 슈팅을 때려볼 수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는 그런 남자들이 매우 드물었으니까.”

잉글랜드축구협회는 1921년 여자 축구 금지령을 선포했다. 여자 축구의 인기에 대한 반사 반응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딕, 커스 레이디스를 비롯한 몇몇 팀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중단된 풋볼 리그의 공백을 메웠다. 그들은 엄청난 관중을 끌어들여 자선 모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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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는 여자 축구가 남자 축구와 거의 대등했다. 필명으로 활동했던 선구자 네티 허니볼은 19세기 말 영국 레이디스풋볼클럽을 창단했다. 그녀의 팀은 전국을 돌며 시범경기를 펼쳤다. 신기한 구경거리라고 생각해 경기장을 찾았던 관중은 높은 경기력에 압도되었다고 당시 보도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경기들은 간간이 열렸다. 남자 축구 사업을 방해하거나 훼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딕, 커스 레이디스를 비롯한 당시 선수들은 아주 위협적이었다. 1920년 박싱데이였다. 딕, 커스와 세인트 헬렌즈 경기가 열린 구디슨 파크에 관중 5만3000명이 운집했다. 관중 수를 집계한 이래 잉글랜드 축구 경기 최대 관중이었다. 잉글랜드축구협회가 인내심을 잃었다.

1년 후, 이사회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축구가 “여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남성 클럽은 여성의 경기장 사용을 거절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딕, 커스 레이디스의 업적은 여성의 성공에 당황한 축구 기득권층에 의해 어둠 속으로 떠밀렸다.

딕 커스 레이디스, 여자축구 흥행의 기원
1970년대 축구선수였던 게일 뉴샴은 자발적으로 딕, 커스 레이디스의 사학자가 되었다. 그녀는 은밀한 스포츠 역사의 반세기를 연대순으로 기록했다. 축구 당국이 있는 힘을 다해 무시한 역사였다. 그녀는 프레스턴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자 축구를 관람한 얘기를 들려줬다. 1992년 어느 지역의 기념행사에서 딕, 커스 출신들을 함께 불러 모을 기회가 생겼다.

“지역 신문에 그들을 찾는 광고를 실었다. 효과가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직접 조사해서 알아내야 했다.”

뉴샴은 과거 딕, 커스의 영웅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과거에 여자 축구가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 깨달았다. 후세기에 활동한 그녀의 경험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때는 여자 축구선수들이 완전히 무시당했다. 뉴삼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처음 만난 선수가 내게 50년대 팀 사진을 보여줬다. 터치라인에 있는 머릿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감독과 그의 개가 전부였다. 아무도 우리를 보러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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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뉴샴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책을 출판했다. 정보 수집을 계속하면서 개정판도 발행했다. 그녀는 딕, 커스의 스트라이커 릴리 파를 특히 좋아했다. 릴리는 현역 시절 1000골 이상을 넣었던 골초 불량배였다. 뉴샴은 그녀가 좀 더 널리 인정받길 바랐다.

“그녀들의 통계는 대단했다. 그런데 딕, 커스 레이디스의 업적은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축구가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런 역사를 지닌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당국의 딴청에도 불구하고 뉴삼이 탐구할 장소가 있었다. 신문기록보관소에는 딕, 커스의 1960년대 역사가 연대순으로 기록돼 있었다. 남성우월주의자와 유력자 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여자 축구선수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1969년 여자축구협회가 주도권을 잡고 독립기구로 축구를 관장했다. 여자 축구는 잉글랜드 스포츠계의 일급비밀이었다.

금지령이 그녀들을 막았다. 축구 시설 사용이 금지됐기 때문에 럭비 구장이나 관목지, 학교 운동장 등 뛸 수 있는 곳으로 옮겼다.

실비아 고어가 맨체스터 코린티안스 시절을 회상한다. “프로그레인의 공원 경기장에서 경기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오두막에서 감독이 길러다 준 양동이 물로 씻었다. 난방이고 뭐고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잉글랜드 여자 축구 암흑기
수 로페스는 한 시즌을 제외한 현역 20년을 사우샘프턴에서 보냈다. 그녀는 1950년과 60년대에 자신을 비롯한 많은 세인츠 동료들이 남성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웃의 두 소년과 축구를 했다. 그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연습을 시작했다.”

“소녀들은 자랐던 대규모 아파트에는 중앙에 공을 찰 만한 좁은 녹지가 있다. 지금은 협회가 일정 연령까지 혼성 축구를 허용한다. 잘하는 이들과 어울려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두세 명 빼고는 다 형편없는 여자애들 틈에서는 배울 게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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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페스의 친구와 동료의 학교에는 여자 축구팀이 없었던 탓에 축구에 늦게 입문했다. 그녀들은 종종 다른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지역 혹은 국가를 대표했다. 그냥 남들과 달라지고 싶었다. 로페스는 “우리는 스포츠우먼이었다. 그게 좋았다. 종목이야 어떻든 간에 운동선수라는 느낌이 특별했다. 금요일 저녁에 술이나 마시는 것보다는 훨씬 좋았다”라면서 웃었다.

“우리는 사우샘프턴 커먼에서 경기를 하곤 했다. 거기에는 카우어즈(소 치는 사람들)라는 펍이 있었다. 빅토리아시대 분위기였다. 그때 축구 경기장들은 정말 거칠었다. 네트도 없었다. 우리는 대부분 그런 곳에서 뛰었다. 가끔 사용하는 남성 전용 경기장도 별반 나을 게 없었다.”

로페스처럼 재능 있는 여자 축구선수들은 그동안 고난을 겪었다. 1971년 로페스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뛰었다. 프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비만 받는 정도였다. 숙소는 동료와 같이 썼다. 그녀는 1년 동안 더 많은 관중 앞에서 더 좋은 경기장에서 뛰는 게 좋았다.

로페스는 마지못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여자축구협회가 외국에서 뛰는 선수들이 아마추어 신분을 망각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체육회 지원금도 끊길 위기였다.

“정말 돌아가기 싫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뛰는 선수들을 제명하겠다고 계속 위협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가?’라고 자문했다. 어머니와 가족, 친구들이 모두 잉글랜드에 있었다. 결정해야 했다. 나는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그들을 설득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로페스는 이탈리아로 떠났던 1971년 사우샘프턴으로 복귀했다. 그녀의 팀은 여자 축구 강호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때마침 여자 축구 금지령이 공식적으로 해제됐다. 필요한 모든 지원이 즉각적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여자축구협회와 제휴하길 원했다. 지역 축구협회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손안에 넣어야 했다. 자원봉사 네트워크 자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구단들은 최선을 다해 살림을 꾸렸다.

“감독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일급 지도자와 일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최선을 다해줬다. 훈련은 아주 기본적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워밍업을 했다.”

날씨가 궂거나 시설 사용이 불가능한 날에는 좀 더 혁신적인 훈련을 해야 했다. 우체국에서 일하던 자원봉사자 중 한 명이 묘안을 내놓았다. “그녀는 ‘우체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편물 상자들 주변에서 뛰었다. 그래도 따뜻하긴 했다. 우리는 그렇게 운동했다.”

여자 축구의 시설 부족 때문에 젊은 선수들은 연습도 없이 바로 1군에 투입됐다.

“젊고 뛰어나고 유망한 선수들이 있었지만 유소년팀은 없었다. 대충 경기가 되겠다고 생각되면 우리가 상대해줄 때도 있었다. 적어도 훈련은 그랬다. 그러다가 약팀과 만나면 그녀들을 내보냈다. 요구에 부응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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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환경 딛고 지킨 역사
잉글랜드축구협회는 여자 축구를 포섭하는 데 실패했다. 로페스는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잉글랜드는 여전히 여자 축구를 일찍 수용한 국가들에 뒤처진다.

로페스는 자신이 활동한 시절의 잉글랜드축구협회에 대해서 “그들은 돕기는커녕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놓고 부정적이었다”라고 말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달랐다. 로페스와 사우샘프턴은 1970-71시즌 창단된 후 10년 동안 FA컵을 지배했다. 그들은 초창기 11차례 결승전 중에서 10회 출전해 8번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 때마다 누군지도 모르는 인물이 등장해 악수하고 트로피를 건넸다. “우리가 결승전에 진출하면 최고로 높으신 놈팡이가 나타나서 트로피를 건넸다. 우리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라고 생각했다.”

국제무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 여자대표팀은 수년간 활동했다. 그런데 출전과 득점 기록이 인정되기 시작한 건 협회의 금지령이 풀리고 나서였다. 이후 경기장은 아주 조금 나아졌는데, 고위 인사들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로페스는 “국가대항전에는 협회 누군가가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체면치레 해야 했다”라고 설명했다.

실비아 고어는 잇따른 입단 테스트 후 최초의 잉글랜드 공식 대표팀에 선발됐다. 그녀는 1호 골을 넣었다. 1972년 11월 스코틀랜드전에서 잉글랜드는 고어의 골 덕분에 0-2 상황을 뒤집었다. 협회가 여자 축구를 금지한 지 5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딕, 커스 레이디스가 잉글랜드 대표로 영국과 세계 투어를 시작한 지 55년 만이기도 했다. 영국 레이디스 축구 클럽이 창단된 지는 거의 80년 만이었다.

로페스는 A매치 22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국가대항전이 드문 시절이었다. 경기 주선이 어려웠다. 상대가 거의 없었고, 선수들은 직장에 휴가를 내야 했다. 결국, 돈에 쪼들렸다. “우리는 모두 굉장히 뿌듯했다. 노력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다.”

로페스는 은퇴 후 축구 역사를 편찬했다. <공 차는 여자들>은 지금도 명저로 통한다.

“나는 우리가 한 일이 자랑스러웠다. 여자축구협회가 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자들이 축구계에서 당한 취급에 분노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 분노를 다스렸다. 그 이야기는 은폐됐다. 나는 그게 너무 속상했다.”

로페스는 심지어 2000년대 중반 사우샘프턴의 감독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녀는 정리해고되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된 남자팀이 여자팀의 재정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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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역사 지워버린 축구협회
게일 뉴샴의 현역 시절에도 빈곤했다. 그녀는 특히 한 경기장의 라커룸을 기억한다. 닭장이었다. 화장실은 기름통이었다.

“그 경기장은 내세울 것이 별로 없었다. 온수가 나왔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축구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뛸 수 없었다.”

실비아 고어는 축구 열정을 한시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북서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어리고 젊은 여성에게 나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지역 축구를 관할하는 수많은 위원회에도 가담했다. 맨체스터 시티 여자축구팀은 그녀를 구단 명예대사로 초청했다. 그들은 그녀의 공로를 인정했다. 고어는 옛날 맨체스터 코린티안스 동료들과 재회할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2016년 여자 슈퍼리그 시즌 말에 맞춰서 그 모임을 준비했다. 시티가 챔피언십 트로피를 들어 올릴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고어는 살아생전 시티의 첫 WSL 우승을 보지 못했다. 2016년 9월 그녀는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녀의 삶과 경력은 언론의 관심을 통해 인정받았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경기 중 1분간 묵념이 있었다.

로페스도 고어처럼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여자 축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축구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그녀는 “지금 소녀들이 우리의 노력을 알아주길 바란다. 단순히 ‘운 좋은 분들이군요. 부럽습니다’라고 지나칠 일이 아니다. 실비아 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했고, 그녀들의 아버지와 형제, 이웃들이 여자 축구를 지원했기에 오늘이 있다”라고 말했다.

뉴삼은 역사 망각의 위험을 엄중하게 경고했다.

1993년 잉글랜드축구협회는 공식적으로 여자 축구를 접수했다. 20년 후, 그들은 여자 유러피언챔피언십에서 “여자 축구 20주년”을 축하했다. 그들은 그렇게 백 년의 역사를 간단히 지웠다. 어쩌면 제2의 여자축구 황금시대의 도래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자 축구의 존립에 기여한 모든 이들의 고투를 더욱 명심해야 한다. 물론 프레스콧의 그 12세 소녀도.


사진=포포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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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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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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