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story] 소박하게 위대하게… 한여름 ‘서프라이즈’ 은퇴식

기사작성 : 2019-07-23 22:31

- 모든 선수는 그 시절 누군가의 영웅이었다
- 소속팀도, 일정도 제각각인 이들이 뭉쳤다... 한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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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배진경]

“광훈아, 아무래도 시간 내기 힘들 것 같은데.” (황진성)
“아, 얼굴만 잠깐 봐요. 서울 가는 김에 형 보러 들를 테니까.” (신광훈)

22일 낮 서울 반포종합운동장. 오전 개인 레슨을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던 황진성은 무더위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다 깜짝 놀랐다. 하루 전까지 약속 일정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후배 신광훈이 눈앞에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황진성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체 무슨 일이야?”라는 말만 반복했다. 신광훈 뒤로 김원일(제주), 이슬기(강원 코치), 조찬호(전 서울E) 등 익숙한 얼굴들이 줄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또 택시 한 대가 운동장 앞에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이는 고무열(아산)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황진성을 뒤로 하고 “무열이 어제 해트트릭 잘 봤다” 같은 축하와 안부 인사가 뒤섞였다. 태연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놓은 이들은 곧 다시 “진성이 형”을 불렀다.

황진성의 손에 그의 현역 시절을 담은 사진 액자와 꽃다발이 전해졌다. 그제야 마음을 담은 목소리가 더해졌다.
“수고 많았어요, 형! 응원합니다.”
한 사람을 위한 ‘깜짝 은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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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운드에 조용히 고한 안녕

황진성은 장수 K리거였다. 2003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포항스틸러스에 입단해 강원 소속이던 2018년까지 16년 간 프로 무대를 누볐다. 벨기에(AFC투비즈)와 일본(교토상가, 파지아노 오카야마)에서 뛰던 2년을 제외하면 14년 간 K리그에서 활약했다. 쌓아올린 공격 포인트가 100개를 훌쩍 넘는다. K리그 통산 338경기 출전에 54골 67도움을 기록했다.

그러나 황진성을 설명하는 방식은 숫자보다 수사가 어울린다. 혹자는 그를 예측불허의 패스와 정교한 킥을 뿌려대던 ‘아름다운 왼발’로 떠올리고, 혹자는 브라질 선수보다 더 뛰어난 기술과 유려한 드리블을 선보이던 테크니션으로 기억한다(실제로 과거 포항을 지도했던 브라질 출신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은 황진성을 두고 “브라질 선수 같다”고 평했다). 이런 개성을 통칭하는 타이틀이 있다. ‘황카카’라는 별명이다. 카카는 황진성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이기도 했다. 골을 넣은 뒤 하늘을 향해 양 손의 검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는 세리머니도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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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선수로서의 삶은 끝이 있기 마련이다. 여느 선수처럼 황진성도 한정된 시간을 살았다. 언젠가부터 어렴풋이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난 시즌 강원에서 출전 시간이 줄어들고 역할도 바뀌면서 작별을 예감했다. 강원과 계약 만료 후 잠시 새 팀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새 시즌 K리그 선수 등록 마감시한인 3월이 되자 마음을 정리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조용히 은퇴를 알렸다.

# “진성이 형을 이렇게 보내면 안되는데”

정작 황진성의 마지막을 안타까워한 건 후배들이었다. K리그에서 적지않은 성취를 이루고도 쓸쓸히 사라지는 뒷모습이 남 일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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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이 앞장섰다. “진성이 형 같은 선수를 그냥 보내면 안될 것 같다”며 뜻을 모았다. 신광훈과 신진호(울산), 조찬호, 이슬기가 동참했다. 짧게는 2년 남짓, 길게는 5, 6년 넘게 포항에서 함께 뛴 인연이었다. 신광훈은 “2012년, 2013년 함께 우승했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훈련할 때나 경기할 때나 함께하면 늘 행복했던 선수들”이라고 소개했다. 여기에 경찰청 복무 중인 이명주와 고무열도 마음을 보탰다.

소박하게라도 은퇴식을 마련해주기로 했다. 황진성의 현역 시절 사진을 고르고 골라 액자에 담았다. 액자 뒷면은 황진성에게 전하는 후배들의 응원 메시지로 채웠다. ‘깜짝’ 이벤트로 황진성을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저마다 소속팀도 다르고 경기 일정도 제각각이어서 만날 약속을 잡기 쉽지 않았다. 신광훈의 ‘낚시’가 이뤄진 이유다.

D데이는 7월 22일. 앞서 주말 경기를 끝내고 짧은 휴가를 얻은 이들이 하나둘 서울로 모였다. 신광훈과 이슬기 코치는 전날 울산 원정 경기를 치른 뒤 상경했고, 조찬호는 양평에서 서울로 합류했다. 김원일은 경남과 원정 경기를 치른 뒤 제주로 복귀했다가 이날 새벽 6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번거로운 동선을 감수한 이유는 “진성이 형에게 전할 액자를 제주 집에 두고 왔기 때문”이었다고. 신진호는 수요일(24일) 경기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고무열이 황금같은 휴가 중 하루를 고스란히 황진성에게 내주는 성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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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황진성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다들 너무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면서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챙겨주나 싶다. 이런 걸 준비하고 먼 길을 왔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고 감동을 전했다.

# “휴가 때 모여 공 좀 차야겠어요”

요즘 황진성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한창이다. 서울 강서구의 ‘K리거 강용 축구교실’ 3호점을 운영하고 있다. 5세 전후에서 초등학교 4, 5학년까지 취미반 아이들은 물론 엘리트 선수 레슨도 진행한다. 직접 봉고를 몰면서 등하원을 시키고 볼을 나르는 ‘궂은 일’도 마다 않는다.

축구교실 운영에 본격적으로 나선 건 한 달 남짓. 적성에 맞다고 느낀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즐겁게 축구하는 법을 알려줄 수 있어 좋고, 엘리트 선수들에게는 내가 가진 기술을 좀 더 전문적으로 전할 수 있어 보람 있다”고.

축구인생 2막을 올리기까지 황진성에게 뒤를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이날 ‘깜짝’ 은퇴식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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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었다. 요 근래 지난 시간이 그리운 적도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식단이나 훈련량, 경쟁 같은 스트레스가 없어서 정말 좋았다. 그런데 동생들 얼굴을 보니까 기분이 묘하다. 한 팀이었을 때 정말 재미있고 좋았다. 같이 뭉쳐서 즐겁게 지냈던 그 시절이 좀 그리워진다.”

후배들 덕에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순간을 만들었다. 16년의 프로 생활을 따뜻하게 추억할 수 있는 마무리가 된 셈이다.

“보고 싶었던 얼굴들을 보니까 너무 좋다. 같이 보낸 시간이 좋았기 때문인지 또 함께 공을 차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겨울 휴가 때라도 종종 만나 공 좀 차야겠다!”


사진=이연수, FA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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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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