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울산] ‘우승설계자’ 포항과 라이벌전 희비극

기사작성 : 2019-12-02 04:04

- K리그1 38R 울산 1-4 포항
- 동해안 더비 악몽 혹은 짜릿한 영광
- 다 잡은 우승컵 놓친 울산의 문제는 무엇?

본문


[포포투=배진경(울산)]

“매 경기 스코어별, 상황별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

킥오프 한 시간 전.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김도훈 울산 감독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들뜨지 않으려 애쓰는 표정. 일반적인 예상대로라면 호랑이 엠블럼 위로 별 하나가 더 그려질 참이었다. 경기 전 순위표와 각종 데이터는 시나리오 곳곳에 ‘울산 우승 플래그’를 펄럭이고 있었다. 전북에 득점으로는 1골 모자라지만 승점 3점차로 앞선 상황. 이기거나 비기거나, 심지어 지더라도 다득점이라면 우승컵을 들어올릴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든 김도훈 감독에게 시나리오 수백 가지가 있었다 해도 이런 스코어는 머릿속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1-4 패배로 우승컵을 날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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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1 최종전이 벌어진 1일. 울산으로 향하는 KTX 차창 밖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겨울비가 종일 전국을 적셨다. 울산종합운동장에는 비를 피하는 관중들이 옹기종기 모여 관중석을 채우고 있었다. 계절 특유의 어두운 색채 탓이었을까,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근사한 풍경이 연출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때 좌중의 시답잖은 걱정을 눌러버린 목소리. “수중전은 우리에게 긍정적이다. 오늘 비가 축복의 비가 되어주면 좋겠다!” 김기동 포항 감독이었다.

김기동 감독이 보인 여유가 곧 이날 포항의 팀 분위기였다. 경기 후 공동취재구역 풍경으로 건너 뛰면, 포항 주장 김광석은 이렇게 말한다. “선수들에게 마지막까지 재밌게 하자고 했다. 재밌게 한다는 건 패스미스가 나와도, 실수를 하더라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포항은 지더라도 잃을 게 없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경기는 도전적이다.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즐겁다. 경기 내내 이 흐름이 유지됐다. 일류첸코-팔로세비치 합류 후 공간을 활용할 수 있게 된 완델손은 여느 때처럼 펄펄 날았고, 송민규는 마음껏 달리고 돌파하며 울산을 약올렸다.

울산은 즐기지 못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쉬운 승리가 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시즌 중 가장 무기력한 경기로 다 차려진 밥상을 걷어찼다. 우승이 걸린 리그 최종전에 리그 내 최고 라이벌전이라는 부담까지 더해졌다. 경직된 움직임과 조급함이 실수로 범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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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26분 윤영선이 드리블하다 팔로세비치에게 볼을 빼앗겼다. 김기동 감독이 “(상대가)라인을 올릴 거라 생각하고 카운트어택을 준비했다”고 했던 장면이 송민규를 거쳐 완델손의 발로 마무리됐다. 선제골 빌미를 제공한 윤영선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1-2로 끌려가던 후반 42분에는 ‘참극’이 연출됐다. 골키퍼 김승규가 직접 스로인을 처리했다. 볼은 상대 허용준에게 사실상 어시스트 궤적을 그렸고, 허용준은 텅 빈 골문을 향해 여유있게 슈팅을 날렸다.

세 번째 실점에 실망한 관중들은 바람처럼 일어나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실상 돌이킬 수 없는 승부를 모두가 인정한 순간이었다. 지난 여름 울산으로 복귀한 김승규는 하반기 내내 엄청난 선방으로 울산의 선두 질주를 도왔다. 그 활약상을 떠올리면, 이렇게 마무리하는 최종전은 그에게 너무 잔인했다. 추가시간에 허용한 네 번째 실점도 페널티킥이었다. 김승규의 실수도, 페널티지역에서 나온 파울도 조급함이 앞선 결과였다.

같은 시간 전주에서 전북은 강원에 1-0으로 승리했다. 효율적인 스코어를 끝까지 지켰다. 그렇게 울산은 눈 앞에 있던 우승트로피와 다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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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취재구역에서 울산 선수들의 목소리를 듣긴 어려웠다. 고개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승규는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김보경이 어렵사리 선수단을 대표했다. “실점 후 동점하고 또 실점했던 부분이 계속 선수들을 조급하게 만들면서 어려워졌다. 만회하려다 보니 공격에 더 치우치게 됐다.”

이쯤에서 ‘12월 1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6년 전 역전 우승을 허용했던 그날의 악몽이 재현됐다. 우승팀은 다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울산의 발목을 잡은 팀은 포항이다. “새 역사를 만들겠다”던 김도훈 감독의 선언은 비극이 됐다. 누군가는 ‘황선홍 그림자’에 오싹할지도 모를 일. 김기동 감독은 경기 전 황선홍 당시 포항 감독과 통화한 내용을 소개했다. “황 감독님께 현장에 오셔서 기를 달라고 요청했다. 응원하시겠다며 그러더라. ‘(6년 전)그런 징크스는 쉽게 깨지는 게 아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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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바로 라이벌전 묘미다. 포항팬들은 감독에게 “다른 팀엔 다 져도 울산만큼은 이겨달라”고 요청하고, 울산전 대승을 확인한 포항 관계자는 “우리는 사실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시즌인데 왜 이렇게 신나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포항 선수들이 더 독기를 품고 나올까봐 이번에는 경기 앞두고 도발을 자제했었는데…”라는 울산 프런트의 눈물 젖은(?) 증언까지 더해지면 희비극의 완성이다. 그렇게 라이벌전 역사는 이어지고, 새로운 전쟁을 예고한다.

울산이 패배 후유증에서 단숨에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 지점에서 단순한 축구의 진리를 곱씹어야 한다. 이기려면 골이 필요하다. 습관처럼 지키는 축구를 하는 것보다 골을 넣는 데 더 몰두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해도 김도훈 감독의 시나리오는 해피엔딩에 가까웠을 것이다. 전북과 똑같은 승점(79)을 만들고도 딱 한 골이 모자라 준우승에 그친 현실이 애처롭다. 우승을 원하는 자, 골을 넣을지니.


사진=FAphotos


+) DID YOU KNOW?
포항이 마지막까지 힘을 낼 수 있었던 계기가 뜻밖이다. ‘희대의 승부’ 때문이었다. 6월23일 강원 원정에서 4-0으로 리드하다 4-5로 역전패한 그 경기다. 충격적인 패배에 양홍렬 포항스틸러스 대표 주재로 비상 대책회의가 열렸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는 포항의 저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데 뜻이 모였다. 양 대표는 금주를 선언했다. 소문난 주당이지만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방울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김기동 감독과 코칭스태프도 휴가를 반납했다. 쉬는 날에도 클럽하우스에서 상대 분석과 경기력 회복을 고민했다. 구단 직원들은 더 많은 관중들을 경기장에 불러모으는 것으로 힘을 보탰다. 아침잠을 포기했다. 매일 아침 포항 시내 곳곳을 돌며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응원을 요청했다. 8월 이후 하반기 놀라운 상승세(9승3무4패)에는 ‘십시일반’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다. 최종전 후 김광석은 “우승한 것 같은 분위기”라며 “감독님이 내년에는 우승을 준비하자고 했다”고 팀 분위기를 전했다. 시트콤 같던 역전패도 이렇게 먹으면 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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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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