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전주] 보로 팬이 이동국 유니폼 입고 K리그 보던 날

기사작성 : 2020-05-0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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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배진경(전주)]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대략 한 달 전, 중앙방역대책본부는 국민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띄웠다. 사실 어떤 선언이라기 보다 생활방역 단계로 전환을 앞두고 주의를 유지해달라는 당부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다른’ 문이 열렸다. 적어도 축구 세상에서는 그렇다.

8일 저녁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고대하던 2020 K리그가 개막했다. 공식 개막전 주자는 디펜딩 챔피언 전북현대와 지난해 FA컵 우승팀인 수원블루윙즈다. 찌푸린 하늘과 축축한 공기, 경기 시작 전 수중전을 예고하듯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 생각해보니 작년 K리그를 마무리하던 날도 이런 날씨였다. 무려 5개월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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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개막전은 일종의 의식으로 시작한다. 디펜딩 챔피언이 그라운드로 입장할 때 상대 선수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축하와 존경의 박수를 보내며 맞이하는 것, 이른바 ‘가드 오브 아너(Guard of honour)’다. 평소였다면 양쪽 골대 뒤 스탠드를 가득 메운 팬들이 열기를 점화했을 순간이기도 하다. 전북 팬들은 ‘오오렐레’를 합창하며 선수들의 입장을 맞았을 테고, 수원 팬들은 야유로 맞서며 자기 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웠을 것이다. 그렇다, 가정이다. 실제 선수들이 입장할 땐 에스코트 키즈도, 살가운 스킨십이나 하이파이브도, 상대팀 선수와 나누는 눈빛 대결도 없었다. 우승팀 앤섬이 되어버린 퀸의 ‘We are the champions’가 잠시 적막을 깨트렸다. 새삼 깨달았다. 이 노래가 이렇게 공허하게 울려 퍼질 수도 있구나.

따지고 보면 모든 풍경이 익숙한 듯 낯설다. 발열 상태 체크로 시작하는 경기장 입장부터 마스크로 가린 얼굴, 제한된 동선, 텅 비어버린 관중석까지. 초유의 무관중 경기 시대를 맞는 홈팀은 진공을 메우려 애썼다. 녹음된 팬들의 함성을 흐름에 맞춰 틀었고, 골대 뒤는 거대한 통천으로 덮었다. 중앙 스탠드는 카드섹션으로 꾸몄다. ‘#C_U_SOON(곧 다시 만나요)’과 ‘STAY STRONG(건강하게 지내세요)’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역설적으로 무관중 경기장은 원정팀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이임생 수원 감독이 고백했다. “전북 팬들이 가득했다면 우리 어린 선수들이 심리적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솔직히 그런 면에서 원정 경기지만 어드밴티지를 얻었다”고도 했다. 아닌게아니라 수원의 수비는 진득했다. U-22 출전 규정 덕에 기회를 얻은 박대원은 헨리, 이종성과 함께 백스리 일원으로 나서 집중력을 보였다. 70여 분이나 무실점을 지켰다. 미드필더와 수비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부담을 잔뜩 안았던 수원 입장을 생각하면 “80%까지는 수비수들 덕”이라던 감독의 심정에 공감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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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은 사실도 있다. 전북은 나머지 20%만으로도 승부를 내는 힘이 있는 팀이다. 그러니까 후반 중반까지는 점유율과 슈팅수에서 상대에 앞서고도 어수선한 상태였다. 특유의 속도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골문에 가까워질수록 파괴력이 생기던 전북의 공격은 이날 따라 둔탁했다. 뜻하지 않게 길어진 ‘프리시즌’의 영향일까? 이렇게 감각이 무뎌질 정도일까? 팀을 떠난 선수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했다. 로페즈라거나 문선민이라거나 김승대라거나… 뭐, 그런 이름들.

후반 15분, 잡념을 한번에 날려버릴 존재가 등장했다. 이동국이다. 교체 출전 10여분 만에 강력한 슈팅으로 인사를 건넨 그는 후반 38분 손준호의 코너킥을 머리로 받아 간결하게 수원 골망을 갈랐다. 수원 안토니스 퇴장으로 전북이 수적 우세를 점하게 된 시간이었다고 해도, 경기 통틀어 가장 ‘살아있는’ 감각을 보여준 이가 만 41세 베테랑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동시에 이 모든 순간은 코로나 시대의 축구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생명력을 가진 콘텐츠가 됐다. 경기 전날 20개국에 K리그 중계권을 판매했다는 프로축구연맹의 안내는 경기 직전 그 대상이 총 36개국으로 늘어났다는 소식으로 수정됐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는 ‘kleague’라는 해시태그로 검색되는 버즈량이 급증했다. 영국 BBC스포츠와 BBC MOTD(매치오브더데이, 경기 분석 프로그램) 트위터는 전북 스탠드의 카드섹션 메시지를 시작으로 경기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서비스하고 주요 상황을 문자 중계했다. 통계 사이트나 베팅 사이트 계정은 이동국의 연도별 득점 기록을 정리해 공유하기도 했다. 이동국은 영국 계정에서 '전 보로 선수'로, 독일 계정에서 '전 브레멘 선수'로 소환됐다. 다양한 나라, 다양한 언어로 실시간 소비되는 K리그를 상상이나 했을까. 눈으로 확인하고도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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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마다 현지 팬들의 멘션이 붙었다. “김보경이 뛰고 있어(Kim bo is playing)”라거나 “맨스필드전에서 넣었던 골 잊지 못해(Will never forget that goal against Mansfield)”라며 이동국의 FA컵 활약상을 추억하는 팬도 등장했다. 심지어 미들즈브러 한 팬은 이동국의 영문명이 새겨진 보로 유니폼을 입고 “화면으로 이동국을 다시 보니 반갑다. 12년 만에 다시 꺼내 입는다”며 ‘인증샷’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대한 이동국의 반응은? “영국에 팬들이 별로 없을 텐데.(웃음) 그분들께 생존 신고할 수 있어 다행이다!”

사실 K리그에 대한 해외의 관심 급증은 호기심에 가깝다. 조세 모라이스 전북 감독의 말처럼 “대한민국이 어떻게 코로나에 대처해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다”가 핵심이다. BBC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꾸준히 한국의 방역법과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성공적인 대처 사례 등을 다뤄왔다. K리그를 성의있게 전달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국, 그리고 유럽에서는 축구가 일상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축구의 시작은 일상으로의 복귀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현재 지구상에서 축구를 진행하는 나라는 단 5개국이고, 이중 한국은 체계적인 방역 시스템과 축구 관계자 전수 검사를 통해 ‘뉴노멀’의 그라운드를 준비한 유일한 나라로 교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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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감염병은 재난이 될 수 있다. 일상이 쉽게 부서질 수 있다는 걸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다. 동시에 디지털 기술의 진화와 뉴미디어의 등장은 전에 없던 교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동쪽의 ‘살아있는 축구’가 서쪽에 일상 복구의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이동국의 골 셀러브레이션이 특별해진다. 이동국은 득점 후 수화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덕분에 챌린지’ 동작을 선보였다. 동료들과 함께였다. 이동국은 “힘든 시국에 고생하신 분들과 의료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분들 덕분에 우리가 잘 이겨내고 축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성취 혹은 K리그 시즌 첫 골이라는 가치와 의미를 뒤로 했다. 축구라는 일상을 회복하게 한 사회적 연대에 공을 돌린 순간이었다.

축구가 세상을 위로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다른 세상, 그리고 새로운 일상을 준비하는 이때에 이동국과 동료들의 세리머니는 또다른 용기를 불어넣어준 셈이다. 뷰티풀 게임, K리그가 돌아왔다.

사진=FA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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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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