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interview] 판 할 “2002년 후임 부탁한 퍼거슨, 계속 안 떠나!”

기사작성 : 2020-12-11 18:17

- 판 할 인생, 19세 to 69세
- 아약스, 바르셀로나, 네덜란드, 맨유를 돌아본다
- 아직도 맡고 싶은 팀이 있다고…?!

본문


[포포투=Arthur Renard, 에디터=조형애]

루이스 판 할은 유럽 4대 리그에서 14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외에, 그를 구분 지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위업이 있다. 아약스부터 올드트래퍼드에 이르기까지, 판 할은 많은 젊은 선수에게 기회를 주었다. 선수들은 훌륭히 그 믿음에 보답했다.

판 할은 암스테르담 연고의 아약스에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아약스에서 그는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은완코 카누 등과 함께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바르셀로나를 2번 맡는 동안에는 카를레스 푸욜, 차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빅토르 발데스 등을 기용했다. 바이에른뮌헨에서는 토마스 뮐러, 홀거 바트슈투버, 다비드 알라바에게 그랬다. 맨체스터에서는 마커스 래쉬포드, 제시 린가드, 티모시 포수-멘사 그리고 안드레아스 페레이라에게 잊지 못할 기회를 주었다.

판 할은 8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라면서, 팀 구성의 중요성을 일찍이 배웠다. 그는 <포포투>에 말했다. “난 형제자매 중 가장 어렸고, 가족 모두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모든 것은 좋은 소통과 규율 아래 만들어졌다.” 그리고 형제자매 사이에서 얻은 것들을 팀에 적용하기 전, 판 할은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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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는 무엇이었나?

스파르타로테르담에서 뛸 때 보통 에레디비시 톱6 안에 들었다. 유럽 대항전도 몇 차례 뛰었다. 1985-86시즌엔 함부르크를 꺾었는데, 거기서 펠릭스 마가트를 상대했다. 그전엔 로열앤트워프에서 활약했다. 애스턴빌라를 상대해 정말 잘한 적이 있었다. UEFA컵 경기 중 하나였는데, 그 경기 이후에 빌라가 내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벨기에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막 1군에 진입한 터라, 기반을 닦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선수 생활을 스트라이커로 시작했지만 서서히 미드필드로 뛰게 되었다. AZ알크마르에선 스위퍼로도 활약했다. 난 공간 인식을 매우 잘했다. 반면 폭발력은 충분하지 않은 선수였다. 19세 때, 이미 정상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라 깨달았다. 아약스 2군에 들어갔는데, 신체적으로 더 나은 선수들이 있더라. 그래도 좋은 커리어였다. 35세까지 뛰었으니 그리 나쁜 건 아니다!

지도자가 되는데 영감을 준 것은 무엇이었나?

어렸을 때 아약스에서 리누스 미헬스의 훈련 세션을 봤다. 그리고 그의 커리어는 내게 영감을 주었다. 그처럼, 나도 체육 교육을  받았고 학교에서 행동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렇게 미헬스의 뒤를 정확히 따라 밟았다. 체육 교사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바꾸는 방법까지 배웠다. 긴 과정이었다. 언제 위로해야 할지, 언제 혼자 두어야 할지 알고,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어조로 대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어린이들도 그렇지만, 선수들에 대한 접근법은 개별적으로 가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접근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995년, 젊은 아약스를 어떻게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끈 건가?

내가 맡았을 때 아약스는 거의 파산할 뻔한 상황에서 나와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카데미 선수들을 데리고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린 야리 리트마넨과 같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값싼 선수들을 얻은 상태였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조지 피니디와 카누도 있었다. 셰도르프, 클라위버르트와 같은 아카데미 유망주들도 있었다. 그게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결국 우린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다. 매우 공격적인 축구를 하면서, 지지 않았다. 디펜딩 챔피언 밀란을 조별리그에서 두 번 꺾었고, 결승에서 다시 제압했다. 사실 그 경기를 아주 잘하지는 못했다. 밀란이  더 지배적이었서 후반전 꽤 이른 시간에 변화를 주었다. 내게는 그런 일이 드문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선수들이 성과를 내주었다. 경기를 바꾼 것이다. 우리의 토너먼트 성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정말 많은 골(18)을 넣었고, 정말 적은 실점(4)을 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성취 중 최고였다.

1997년 바르셀로나 대신 레알마드리드 지휘봉을 잡는 게 선택지에 있었나?

그때는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바르셀로나에 있을 때 접근해왔다. 리그 우승, 컵 대회 우승, 그리고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을 한 뒤였던 것 같다. 2, 3년 차였을 거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에 있다면, 레알로 가는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다.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밀란에 갈 수도 있었다. 그들과 네덜란드에서 만나기도 했다. 난 아약스에서 모든 우승을 해보았다. 새로운 도전을 할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일 년 더 있기로 했다. 막내딸이 중학교를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난 종종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직업 선택을 해왔다. (2005년) 난 알크마르에 갔다. 아내가 장인어른과 더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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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롭슨 후임으로 바르셀로나 감독이 된 게 어색했나?

처음에 난 바르셀로나 아카데미를 맡는 걸로 되어 있었는데, 언어를 배우고 나서 아마도 감독직을 맡게 한 것 같다. 6월이 되자, (조셉 루이스 누네스) 회장이 마음을 바꾼 것이다. 롭슨이 트로피 3개를 연달아 들어 올렸는데도, 그 뒤를 이어줄 것을 제안했다. 난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누네스, 롭슨 그리고 그의 코치였던 조세 모리뉴와 만남을 요청했다. 롭슨과 모리뉴가 결국 잔류한 것도 그 이유다. 다른 계획이 생겼을 때 내가 혼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캄노우에서 모리뉴, 펩 과르디올라 둘 모두와 함께 일했다. 두 사람이 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 거라 생각했나?

둘 다 지도자로 가능성을 보였지만, 예측할 수는 없었다. 첫 만남에서 난 모리뉴에게 전력분석가를 제안했다. 그는 정말로 잘 해냈다. 그래서 코파카탈루냐에서 1군을 지도할 기회로 보상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도자로 판단할 수 없었다. 모리뉴는 상대 전력을 분석하느라 자리를 종종 비웠기 때문이다. 루이스 엔리케가 감독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하지만 과르디올라는 확실했다. 팀에 합류하고 나서, 과르디올라에게 곧바로 주장 완장을 주었다. 가장 논리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기예르모 아모르, 미겔 앙헬 나달 같은 선수들이 더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택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축구를 봤기 때문이다. 그건 매우 중요하다. 피치 위에서는 주장이 감독을 대신한다. 처음부터 난 과르디올라와 다른 선수들에게 스페인어로 말했다.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는 상태였는데, 선수들에게 내가 취약한 면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하면 선수들이 고쳐주기도 했다.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보낸 첫 시기를 어떻게 평가하나? 처음 두 시즌 동안 리그에서 우승했다. 당시 팀은 얼마나 좋았나?

난 3년 차가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우린 내가 합류한 이래 최고의 축구를 했다. 어떠한 트로피도 들어 올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히바우두는 (1999년) 발롱도르를 수상한 이후,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10번으로 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 포지션에는 다른 인식이 필요하다. 히바우두는 왼 측면 공격수로 꾸준히 뛰어왔다. 데포르티보에서도 그랬다. 그의 뇌는 그 포지션에 적응해 있었다. 움직임을 바꾸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는 아마도 10번 자리를 최고의 선수와 연관 짓고 있었던 것 같다. 난 히바우두를 그 자리에서 시험은 해보았다. 그리고 그게 팀의 밸런스를 깨뜨렸다. 그를 벤치로 보냈는데, 다른 1군 선수들이 요청해 다시 돌아오게 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스페니시컵과 챔피언스리그 모두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누네스 회장은 사임했다. 나는 그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사임했다. 그건 내가 2년간의 임금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웃음)

2014년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데이비드 모예스 뒤를 이었다. 2002년에는 알렉스 퍼거슨을 대체할 예정이라는 루머도 있었다. 사실인가?

그건, 사실이다! 퍼거슨 감독이 당시 은퇴를 계획하고 있었고, 내게 후임을 부탁했다. 우린 UEFA 엘리트 코치 포럼에서 알게 된 사이다. 그곳에서 우린 항상 마지막에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나를 후임자로 택했는데, 그가 떠나지를 않았다. 절대!(웃음) 퍼거슨은 마음을 바꿔 계속 지휘봉을 잡기로 했다. 후에 피터 캐년이 접근해오기도 했다. 첼시 감독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차비와 이니에스타에게 데뷔 기회를 주었다. 어린 선수였던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나?

차비는 내가 처음 봤을 때, 이미 리저브 명단에 드는 선수였다. 이니에스타는 15세 무렵에 나이키 대회에서 본 기억이 있다. 두 선수 모두 환상적으로 공간 인식을 했다. 차비가 조금 더 그랬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차비를 중원에 뛰게 한 것이다. 이니에스타는 더 폭발적인 선수여서, 그가 공격적으로 더 많은 걸 할 수 있으리라 보고 미드필더 왼쪽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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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감독들은 어린 선수들을 기용하는데 따르는 위험성을 두려워한다. 왜 당신은 항상 지도하는 클럽마다 기꺼이 어린 선수들을 뛰게 하려 하는가?

왜냐하면, 내 생각인데, 라커룸은 매년 리프레시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선수들이 자동 조종 장치 모드가 되고, 계층 구조가 유지돼 버릴 거다. 좋지 않은 일이다. 어린 선수들은 그걸 흔들어 놓을 수 있다. 그들은 야망이 있고, 또 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이 든 프로 선수들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다.

2002년,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다시 잡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나?


후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 철학에 맞지 않는 선수 몇몇을 샀기 때문이다.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후안 로만 리켈메를 영입하고서 4-3-3으로 경기를 할 수가 없었고, 그걸 적응해야 했다. 난 두 명의 스트라이커를 모두 뛰게 했어야 하는데, 사비올라와 리켈메는 그 앞에 공간이 필요한 선수들이다. 상대가 극단적으로 수비할 때는 효과가 떨어졌다. (1998년과 1999년) 우리가 리그에서 두 번 우승한 뒤, 상대 팀들은 우리를 상대로 버스를 세웠다. 득점하기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린 후방이 취약했다. 뒤에 많은 공간을 둔 채로 높은 위치에서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다. 난 그런 수비를 해결해 줄 선수가 없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도 같은 일이 생겼다. 내가 원하는 선수를 얻지 못했다.

2009년 알크마르에서 에레디비시 우승했다. 얼마나 큰 성취인가?

환상적인 일이다. 특히 우리가 거의 두 번 우승했다는 걸 기억한다면 더 그렇다. 2007년 우린 시즌 마지막 날에 우승을 놓쳤다. 아약스, 바르셀로나, 바이에른뮌헨을 이끌면 리그 우승 가능성이 상당하다. 하지만 알크마르는 그렇지 않다. 예산이 4배나 많은 클럽들을 꺾어야 한다. 내 최고의 성취는 아약스와 함께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것이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한 FA컵 우승도 큰 성취였다. 심리적으론 더 큰 성과였다. 다양한 방법으로, 주위의 여러 저항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2009년 지휘봉을 잡았을 때 바이에른뮌헨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어떻게 첫 시즌에 더블을 하고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이끌었나?

우선 클럽 시스템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5-3-2 포메이션을 다이아몬드 4-4-2 전형으로 바꾸었다. 미드 플랫 전술도 시도했다. 하지만 둘 다 효과가 없었다. 그때가 내가 이사진에게 아르연 로번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다. 로번과 함께라면 공격수 3명을 두고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레알 구단에서 그를 매각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로번이 오른쪽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에겐 좋았다. 왼쪽을 좋아하는 프랭크 리베리가 있어서다. 난 필립 람의 위치 또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꾸었다. 난 항상 선수가 선호하는 포지션에 초점을 맞춘다. 선수 본인은 그것을 완전히 알지 못하더라도 그렇다. 이게 나의 원칙이다. 난 선수의 기술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뒤에 있을 선수도 본다. 이런 접근 방식이 커리어 초기에는 내게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이런 나의 원칙과 내 커리어에 관한 책을 냈는데, 나와 가깝게 일했던 이들의 기여를 적었다. 과르디올라, 로벤, 로빈 판 페르시, 웨인 루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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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네덜란드 감독 지휘봉을 또 잡기 전, 리버풀에서 스포팅 디렉터 자리를 두고 접근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 (이안 에어) 이사가 우리 집이 있는 포르투갈에 왔고, 우린 긴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 난 다시는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리버풀이 진지하지 않았다면, 그가 포르투갈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나중에 내가 너무 거만했다는 식의 말은 들었다. 그건 모르겠다.

2014년 월드컵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로빈 판 페르시가 멋진 헤더를 넣었다. 그는 왜 당신에게 달려간 건가?

그는 월드컵 전에 다쳤다. 그리고 우리 물리치료사들의 도움으로 회복했다. 심지어 난 알렉스 퍼거슨에게 로빈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로빈은 겨우 시간에 맞춰 준비를 마쳤다. 비록 완전하진 않았지만, 난 그를 뛰게 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로벤, 베슬러이 스네이더와 함께 로빈은 팀의 두뇌 역할을 했다. 당시 난 토너먼트를 위한 준비를 했다. 보다 더 방어적으로 시스템을 전환한 것이다. 처음엔 수비수 5명으로 시작했다. 공격하면 3명으로 바뀌는 시스템이었다. 그건 스페인을 상대로 잘 나왔고, 우리 시스템은 아주 성공적인 토너먼트를 치를 수 있게 했다.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한 승부차기에서 골키퍼를 야스퍼 실러선에서 팀 크롤로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그 기간 동안 시러선이 페널티를 막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월드컵 몇 달 전 회의에서 승부차기에는 3선발 골키퍼가 나서야 한다고 말한 적 있었다. 그게 크롤이었다. 난 그 시나리오와 관련해 실러선을 제외한 선수들과 이야기도 했다. 만약 실러선에게까지 이야기했으면 집중력을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별로 고맙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웃음) 난 그를 조금 더 쉽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항상 우선은 팀이다.

그 대회 이후에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 합류했다. 첫 미팅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나?

브뤼셀에서 만났다. 클럽들은 종종 (연고지가 아닌) 다른 나라 도시에서 만난다. 그러니 미디어들이 쉽게 추적할 수 없다. 거기엔 글레이저와 에드 우드워드가 있었다. 그들은 내게 내 비전, 그리고 어떻게 조직하고 싶은지에 대한 모든 것을 물었다. 새로운 선수들에 대한 나의 요구 사항은 채워주겠다고 했다. 난 유나이티드를 부활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걸 얻는 게 매우 어려웠다. 우리는 3순위, 4순위, 또는 5순위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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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이티드에 가기 전, 토트넘에 가는 건 심각한 옵션이었나?

확실히 그랬다. 다니엘 레비가 개인 제트기를 타고 네덜란드에 있는 우리 집에 왔고, 우린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심지어 사우샘프턴과 스퍼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그날 오후 늦게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다. 그는 그 경기를 두고 내 생각을 물어봤다. 그것도 일종의 테스트였던 거다. 저녁이 되어 레비가 떠가려고 했을 때, 난 깨달았다. 집 밖에 TV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 네덜란드 방송사는 레비가 네덜란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나를 보러 왔을 거라 추측했다. 우리는 비밀로 하기 위해서 이웃에게 전화를 걸었고, 레비를 차에 태워 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레비는 뒷자리에 숨었다. 난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기자들에게 무얼 하고 있는 건지 물었다. 일은 잘 되었다. 기자들이 깜짝 놀랐다. 감독은 역시 타이밍이다!(웃음) 스퍼스가 확실한 제안을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유나이티드가 내게 접근했다. 그들은 훨씬 빨리 움직였다. 유나이티드로 와야 한다는 그들의 아이디어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전에 맡았던 네덜란드, 스페인, 독일 클럽처럼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을 지도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스퍼스가 조금 더 일찍 구체적인 제안을 했더라면, 난 스퍼스와 계약을 맺었을 거다. 사실 스퍼스는 내가 어렸을 때 좋아하던 클럽이었다. 지미 그리브스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사실을 레비에게 말했는데, 그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

어떤 선수와 계약하려고 했나?

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를 원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게 확실해졌을 때 나는 그 대신 곤살로 이과인을 영입하려고 했다. 내가 팀에 합류하기 전엔, 이사진들과 네이마르 영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유나이티드에선 크게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 그는 유니폼 판매 면에서, 클럽에서도 흥미로워했다. 나 또한 빠른 윙어를 원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사디오 마네, 리야드 마레즈도 영입하려고 했다. 토마스 뮐러도 내 위시리스트에 있었다. 중앙 미드필더에 원한 선수는 은골로 캉테였다. 난 제임스 밀너까지도 계약하려고 했다. 나이는 꽤 들었지만, 아주 만능이고, 리더십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수비에는 세르히오 라모스와 마츠 훔멜스를 원했다. 우리 팀이 후방에서 빌드업하는 데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나의 영입 톱 타깃들이었다. 한 명도 영입하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감독으로서, 난 어떠한 협상에도 관여하지 못했다. 내가 떠난 뒤 마레즈나 캉테와 같은 선수들은 결국 맨체스터시티, 그리고 첼시로 갔다. 유나이티드는 이들을 영입하지 못했다.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2015년 밤, 팩스가 고장 나서 다비드 데 헤아와 케일러 나바스를 맞바꾸는 계약이 파기되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나?

난 정말 다비드 데 헤아를 팔고 싶지 않았다. 난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고, 구단에 ‘데 헤아가 떠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잉글랜드에서 활약하는 키퍼 중 최고였기 때문이다. 팩스 기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 팩스가 정말 필요할 때, 하필 왜 안되겠는가?

올드트래퍼드에서 보낸 시간을 전반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나?

처음 18개월 동안은 정말 즐거웠다. 길거리에서 팬들이 열렬히 나를 환영해 주었다. 첫 시즌에 우린 챔피언스리그 진출과 팀 리빌딩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리빌딩은 계속했다. 계약하고 싶은 선수들을 영입하지 못하면, 젊은 선수들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즌에는, 볼프스부르크에 패하면서 챔피언스리그에서 탈락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골득실에 밀려 톱4를 놓쳤다. 하지만 FA컵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어려웠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나를 화나게 한 건, 그들이 내게 약속한 3년을 완성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2년 계약을 제안한 건 나였다. 그럼 언젠가 어머니께 약속한 것처럼 65세 때 은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리빌딩 할 시간을 주기 위해 3년을 고집했었다. 하지만 결국 내겐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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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FA컵 결승전 전, 경질된 것을 알고 있었나?

아니다. 심지어 그 직후에도 몰랐다. 우승컵을 들어올린 날 저녁 파티를 열였는데, 디렉터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분명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다음날 집에 도착하니까, 구단에서 집에서 좀 볼 수 있겠냐고 했다. 그제서야 우드워드가 말했다. 내가 떠나야 한다고 말이다. 아내는 이미 12월에 예감했다고 했다. 그녀는 우드워드와 관계가 뭔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난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전과 같은 대화를 계속 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난 그에게 ‘경질하고 싶다면, 그건 이해하겠다’고도 했었다. 12월에 4연패를 했으니 말이다. 비록 우리가 B팀 같은 팀으로 플레이를 했지만, 그 결과가 유나이티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드워드는 내게 걱정 말라고 했다. 경질될 것이라는 이야기, 모리뉴가 나를 대체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웨인 루니는 자신이 함께 일했던 최고의 감독이 당신이라 했다. 축구에 대한 지식과 플레이 스타일이 이유라고 했다. 기분이 어떤가?

그런 말들은 정말 듣기 좋다. 난 매우 요구가 많은 지도자다. 그러니, 선수들이 여전히 그런 말을 해주면 특별히 기분 좋다. 난 웨인에게 주장 완장을 주었다. 팀의 규율과 행동 강령 안에서 그 스스로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끔 힘겨워하기도 했다. 새로운 시기가 시작되고 있었고, 그는 나이가 있는 선수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난 주장직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물론, 그는 뛰어난 선수이기도 했다.

2016년, 미트윌란을 상대하며 유스팀에서 마커스 래시포드를 콜업했다. 그는 얼마나 잘했나?

재주 있는 드리블러라고 생각했다. 그가 늘 그라운드 전체의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 어린 선수였을 때 로벤도 그랬다. 10년 후 상당히 다른 선수가 되었다. 래시포드는 이미 이전보다 그라운드 위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있다. 19세에 계약한 앤서니 마샬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성장했다. 가장 큰 변화는 브루노 페르난데스의 영입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한 선수가 팀 전체의 과정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감독직을 맡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팀이 있나?


나는 외국 대표팀을 지도한 적이 없다. 2년 전에 멕시코가 접촉해온 적이 있었다. 하고 싶었는데 아내는 그렇지가 않아서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다.(웃음) 난 모든 것을 아내와 상의한다. 25년 전, 아내가 나를 위해 커리어를 희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젠 내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다. 독일, 스페인, 잉글랜드, 브라질 또는 아르헨티나 같은 최고 수준의 축구를 하는 팀을 이끄는 것엔 열려있을 거다. 하지만 클럽은, 내가 원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사진=포포투,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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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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