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interview] 시세 “리그앙 99골로 은퇴, 신경 쓰여 죽겠네”

기사작성 : 2021-01-13 10:11

- 이스탄불의 기적부터 맨시티 팬 SSUL까지
- 지브릴 시세가 온갖 사연을 푼다!

본문


[포포투=Leo Moynihan, 에디터=조형애]

사치와 호사, 속옷은 <포포투>가 독자들에게 접수하는 질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아니다. 역으로 다른 선수들이 지브릴 시세는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패셔니스타이자 공격수였던 시세는 유럽 전역, 그 너머까지 아우르며 현역 생활을 즐겼다. 프랑스와 그리스, 잉글랜드에서 성공을 맛봤다. 2005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했던 리버풀 시절도 포함이다.

팬들은 컬러풀한 헤어 스타일과 패션 센스, 시끄러운 자동차, 거대한 타투, 형광빛 수염으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물론 그를 떠올릴 때 20년 동안 쌓은 280골도 빼놓기 어렵다. 그가 얼마나 활달한 사람이었는지와는 별개로 축구를 대하는 자세만큼은 진지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무실에서 한 시간 남짓 보낸 시간 동안 우리는 그가 얼마나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일에 몰입한 선수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몇 번의 심각한 다리 골절상은 첫 클럽 오세르에서 보여준 엄청난 잠재력을 갉아먹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든 시세는 경기에 나서 골을 넣고 싶어했다. 지금 그는 당신이 보내온 곤란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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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망그 시세가 코트디부아르 대표로 뛰었다. 당신의 인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나?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꽤 유명한 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집을 떠나셨지만, 나는 늘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업적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내 야망을 키웠다. 누구도 내게 그걸 강요하진 않았지만 어떤 면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늘 축구였다.

축구에서 우상은 누구였나?

장-피에르 파팽! 난 마르세유 팬이었고 그는 내 영웅이었다. 그가 선수 시절 초기 힘들었다는 게 좋았다. 경기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지만 늘 열심히 뛰었고, 결국 함께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줬다. 멋진 선수였다. 그의 골들을 기억하는가? 그는 ‘발리슛의 장인’이었다.  

유망주였던 오세르 시절, 전설적인 기 루 감독에게선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나?

내 커리어가 전적으로 그의 덕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내 나름의 야망과 직업의식,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 초기에는 나에게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멋진 감독이었다. 내게 축구선수 되는 법을 가르쳐 줬다. 정말 엄했다. 나이트클럽에 전화해 선수들을 찾으러 오기도 했다. 조용히 ‘집에 가자’고 말한 그였다. 나는 딱 한 번 들켰을 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난 파티광은 아니었다. 내겐 축구가 전부였다.

프랑스 황금세대를 잇는 건 어려웠나? 2002년 5월 대표팀에 데뷔할 당시 기분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월드컵과 유로 챔피언이었다. 프랑스 대표팀은 어린 선수를 도울 수 있는 세계적인 선수들로 가득했다. 나는 내가 첫번째 옵션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공격수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내 이름을 천천히 알리고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부담은 없었다. 선수들 모두 내게 정말 잘해줬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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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월드컵 당시 ‘레블뢰’엔 각 리그 최다 득점자들이 있었다. 잉글랜드(앙리), 이탈리아(트레제게), 프랑스(시세) 등이었다. 그런데 A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꼴찌였다. 이유는?

솔직히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다. 당신 말이 맞다. 우리팀엔 최전방 뿐 아니라 측면에도 세계적인 선수들이 있었다. 더 잘했어야 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세네갈과 첫 경기를 앞두고 지네딘 지단을 부상으로 잃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역대 최고 선수였다. 어떤 팀이든 그런 존재를 놓칠 수 있지만, 우리가 더 잘했어야 했다.

당신과 계약한 사람은 제라르 울리에였는데, 라파엘 베니테스 체제가 된 리버풀로 이적하게 된 기분은 어땠나?

우선 나는 리버풀과 계약해 정말 정말 자랑스러웠다. 대표팀에서 나를 잘 알았던 울리에 감독과 함께하게 돼 매우 신났다. 사실 대표팀에서 원정을 떠났을 때 지단이 내 호텔 방에 찾아와 레알마드리드 입단을 요청했지만, 당시엔 나에 관한 리버풀의 관심과 협상 상황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토트넘과 밀란, 그리고 몇몇 빅클럽들도 나를 원했지만 늘 리버풀이었다. 제라르가 해임된 건 내가 합류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게 축구다. 그를 존경했지만 그라운드에서 내 자신을 증명하는 건 내 몫이었다. 라파 감독도 좋아했다. 그는 프랑스어도 했다. 도움이 됐다. 

2004년 10월 다리 골절에 관한 기억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복귀한 비결은?

당시엔 얼마나 심각한 부상인지 몰랐다. 엄청 고통스러웠던 것만 기억난다. 몇달 뒤 의료진이 내게 심각했다고 말해줬다. 발 하나를 잃을 수도 있을 만큼 나빴다. 혈류로 합병증이 있었지만 사고 직후 의료진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 열심히 재활하고 뛰어난 처치를 받은 덕에 정말 빨리 복귀했다. 하지만 서두르거나 모든 걸 걸고 나설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빨리 낫는 것보다 점점 나아지는 데 초점을 맞췄다. 놀랍게도 제 때에 복귀를 맞출 수 있었다. 

2004-05시즌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첼시전에서 안필드 분위기는 어땠나?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 당시 첼시와 라이벌 관계가 강화됐는데, 그 경기는 내가 경험했던 분위기 중 최고였을 것이다. 경기장은 말 그대로 막판에 뒤집어졌다. 종료 휘슬이 울리고 우리가 이겼을 때, 피치는 작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첼시에 빅스타들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존 테리, 디디에 드로그바, 그리고 이 엄청난 상황을 지휘한 주제 모리뉴 같은 감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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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벌어진 2005챔피언스리그 결승을 당신의 관점에서 설명해 본다면? 당신이 뛰었던 최고의 경기인가?

믿기 힘들었다. 나는 벤치에서 출발했다. 우리 모두 전반전이 끝났을 때 경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밀란은 3-0으로 앞서고 있었다. 어떻게 돌릴 수 있겠나? 그런데 그때 스티비(제라드)가 엄청난 말을 하면서 여전히 이 상황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골을 넣었다. 나는 초반에 부상 당한 위대한 동료 해리 키웰 옆에 앉아있었는데, 우리 둘 다 서로를 쳐다 봤다. 갑자기 ‘좋아,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뭔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곧 블라드(스미체르)가 득점했다. 우린 포옹했다. 사비(알론소)가 세 번째 골을 넣었을 때, 벤치는 난리가 났다. 난 정규시간 5분을 남겨둔 시점에 교체 출전했다.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 시즌 막판은 내게 모든 것이 보너스였다. 겨우 4개월 전에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라파는 내게 힘을 불어넣어주라고 말했다. 나는 밀란의 라인을 늘려놓아야 했다. 내 일은 달리는 것이었고, 내 몫을 다했다.

승부차기에선 어떤 기분이었나? 세르지뉴와 안드레아 피를로의 실축을 보고 접근법을 바꿨나?

늘 승부차기에 나설 생각이었다. 명단 포함 여부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감독에게 “제가 찰게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프라인에서부터 걸어 나가고 압박감이 존재하는 상황을 너무 좋아했다. ‘그래, 덤벼봐’ 같은 기분. 세르지뉴와 피를로가 내 앞에서 실축하면서 부담이 좀 덜어졌을지 모르지만, 나는 절대 실축할 것 같지 않았다. 멋진 밤이었다. 

2005-06시즌엔 16강에서 탈락했다. 라파가 당신을 오른쪽 윙으로 쓰던 때였는데…

힘들고 답답한 시간이었다. 2003년에 리버풀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오세르에서 마지막 시즌을 치르기 전이었다. 이후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에, 안필드에서 무언가를 만들기를 갈망했다. 긴 기다림이었다. 적응해야 했고, 사람들을 알아야 했다. 라파 체제에서 내 첫 경기였던 토트넘전에서 골을 넣었다. 하지만 날 위한 시간은 더뎠고, 힘들었다. 계약기간이 5년이었는데 나는 끝까지 가고 싶었지만 라파의 생각은 좀 달랐다. 결국 2007년 페르난도 토레스를 영입했다. 그게 축구다. 그래도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좋았을 거다.

제라드의 책에 ‘피터 크라우치가 당신이 훈련장에 렌즈가 없는 사치스러운 안경을 쓰고 나타났고, 라커룸에서 휴대폰을 연결할 1920년대 촛대 전화기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모두 사실이다!(웃음) 그때 나는 패션 센스가 꽤 좋았고, 동료들을 놀라게 하는 걸 좋아했다. 훈련장에 온갖 ‘미친 패션’으로 나타나곤 했다. 내 차는 오래된 트랜잠(고성능 모델)이었는데, 옆면을 불꽃으로 도색했었다. 지금은 훨씬 더 침착해졌다. 가장이기도 하고! 또 휴대폰을 연결할 수 있는 낡은 전화기도 있었다. 라커룸에 앉아 이 오래된 물건을 꺼내 전화를 걸곤 했다. 리버풀 시절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대단한 선수들도 많았고. 크라우치도 멋진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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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월드컵 직전 프랑스-중국전에서 두 번째 다리 골절상을 입었다. 무슨 생각이 들던가?

물론 타격이었다. 그렇지만 2004년 경험 때문인지 침착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열심히 재활해 복귀하는 거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월드컵에서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운명이 아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해 여름 리버풀을 어떻게 떠났나?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마르세유 빅팬으로 자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연히 복귀(임대)가 신났다. 그렇지만 리버풀을 떠나긴 싫었다. 이제 내겐 가족이 있고 아이들이 정착한 상태였다. 말했듯이 그곳에 가기 위해 오래 기다렸다. 그래도 계속 대기할 순 없었다. 나는 골잡이였다. 9번 스트라이커는 벤치에 앉아 있지 못한다. 뛰어야 한다. 부상에서 복귀해(2006년 12월) 스타드 벨로드롬에서 마르세유를 위해 넣었던 첫골이 기억난다. 어릴 때 사랑했던 팀을 위해 뛴다는 건 멋진 일이었다. 

그 즈음 마르세유에서 잉글랜드로 복귀를 요청했다는 게 사실인가?

마르세유에서 지내는 것, 그 유니폼을 입고 팬들 앞에서 뛰는 게 좋았다. 그래도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맨시티가 적극적이었다.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 시절 접촉이 있었다. 하지만 난 마르세유를 지지했다. 그들이 나를 원했기에 나도 잔류를 결심했다. 

2008년 선덜랜드로 임대 이적했다. 로이 킨이 감독인 걸 어떻게 알았나? 마지막 시즌에 잘못된 이유는?

오, 난 그를 좋아한다! 당시 마르세유는 어린 선수들에게 돈을 쓰고 있었다. 내 에이전트가 로이 킨이 나를 임대로 쓰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마르세유에서 충분한 출전 시간을 얻지 못했기에 ‘안될 게 뭐 있어?’라고 생각했다. 로이는 영리했다. 우린 공통점이 많고, 둘 다 축구를 매우 진지하게 대했다. 로이는 항상 내게 솔직했고, 내게서 최고를 이끌어냈다. 로이와 클럽 모두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더 행복했다는 걸 안다. 로이는 나와 계약하고 싶어했고, 팬들도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당연히 계약하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마르세유가 원했던 수수료가 비쌌던 것 같다. 내가 놀란 건 선덜랜드가 토트넘에서 대런 벤트를 영입할 때 나보다 몇백 만 달러 더 비싸게 샀다는 거다.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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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덜랜드 팬들이 노래했던 것만큼 디자이너 속옷을 좋아했던 게 사실인가?

그랬다! 요즘은 내 속옷들에 대해 좀 잠잠해졌다. 체육관에 갈 때는 좀 더 분명해지는 편이지만 요즘은 대부분 블랙 컬러다. 팬들이 나를 속옷으로 기억해주는 게 좋다. 멋지다.(웃음) 유명한 (팬티 관련)사건은 이스탄불에서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매우 밋밋한 회색이었다. 리버풀은 선수들에게 똑같은 속옷을 줬다. 밀란과 믿을 수 없는 경기가 끝난 후, 리버풀 서포터들과 함께 기뻐하면서 나는 팬들에게 모든 걸 던져줬다. 유니폼 상의, 바지, 축구화, 양말 모두 다. 그 회색 팬티만 빼고. 너무 멀었기 때문일 거다! 오, 메달도 있었지. 그건 목에 걸었다. 

당신이 선보였던 헤어스타일 중 최고는?

탈색 금발 스타일을 꼽겠다. 초기에 시도했던 스타일 중 하나였는데 내 ‘최애 스타일’이다. 최근에는 반 모호크 스타일에 그냥 검은색이었다. 말했듯이 난 요즘 훨씬 침착해졌다고!

파나시나이코스에서 보낸 두 시즌은 어땠나? 그 기간 50골 이상 넣고 타투를 했다는 게 사실인가?

놀라웠다.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한 그 팀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클럽이다. 배지 문신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외에 축구 관련 타투는 이스탄불에서 리버풀의 우승을 기념한 챔피언스리그 별 다섯 개(우승 5회)뿐이다. 슬프게도 올림피아코스 회장인 에반겔로스 마리나키스와 사이가 틀어졌다. 그들과 더비전에서 우리가 패하고서다. 물리적인 충돌은 아니었다. 안전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리그 심판들과도 싸웠다. 이제 꽤 오래 전 일이 되었지만, 그에 관한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 너무 나쁜 판정이 있었고, 그 끔찍한 결정 덕분에 중요한 경기에서 패한 적이 있었다. 완벽한 득점을 했던 나는 주심에게 가 맞서야 했다. “그게 오프사이드였다고?”라고 물으니 “아니”라는 답이 돌아왔다. “근데 왜 인정하지 않았죠?” “선심이 기를 들었으니까.” “누가 주심이에요. 당신이에요, 저 사람이에요?” 이런 식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너무 많았다. 

2010월드컵에서 프랑스 대표팀은 어땠나? 남아공에서 그들이 취한 행동에 동의했나?

좋지 않았다. 우리가 옳은 것도 아니었다.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기억이다. (레몽)도메네크와 니콜라(아넬카)의 초기 논쟁을 지켜본 건 아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후에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면, 옳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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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치오에서 경험은 어땠나? 2011년 반 시즌만 뛰었는데?

좋아했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은 나를 환영해줬다. 또, 그들은 매우 열정적이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문제는 감독(에디 레자)가 나를 오른쪽 윙어로 뛰게 하는 것이었다. 그를 좋아했고 동료들과 서포터들을 좋아했지만 그게 문제였다. 나는 골을 많이 넣지 못했다. 윙 자리는 나와 정말 맞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늘 열정적인 관중 앞에서 뛰는 걸 즐겼다. 리버풀, 마르세유, 파나시나이코스, 라치오, 선덜랜드, 그리고 QPR. 골문 앞을 달리는 스트라이커에겐 그게 전부다. 그런 강렬함이 없으면 완전히 달라진다. 

2012년 1월 QPR과 계약 후 벌어진 희한한 상황들에 대해 말해준다면? 반년 동안 모든 경기에서 골을 넣거나 퇴장을 당했는데?

나는 라치오에서 많이 뛰지 못했다. 에이전트가 마크 휴즈 감독이 나를 원한다고 했다. QPR은 강등 위기였다. 하지만 그들을 프리미어리그에 잔류시킬 수 있는 시간이 6개월 있었다. 팀은 득점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OK,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내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일이야’라고 생각했다. 전력은 괜찮은 팀이었다. 그래서 합류했다. 첫 경기에서 골을 넣어 기뻤다. 그런데 다음 홈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았다. 위험한 태클이 들어왔고, 두 다리가 부러진 기억이 있었다. 상대(로저 존슨) 목을 잡았는데 레드카드였다. 징계 후 출전한 볼턴전에서 골을 넣었다. 이후 리버풀과 홈경기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런데 선덜랜드 원정에서 나쁜 태클을 시도해 퇴장 당했다. 가장 큰 건 스토크를 상대한 시즌 마지막 홈경기였다. 꼭 이겨야 할 경기였고, 나는 막판 결승골을 넣었다. 결정적 한 방이었다. QPR 팬들이 그 경기를 기억한다는 걸 안다.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2011-12시즌 맨시티와 최종전에서 골을 넣었을 당시 기분은? 종료 당시 사미르 나스리와 함께 기뻐한 이유는?

그것도 중요한 골이었거나 그랬어야 했다. 우린 승점이 필요했고 그걸 이룬 것 같았지만, 그때 그 유명한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골이 나왔다. 맞다, 종료 휘슬이 울리고 사미르와 함께 기뻐했다. 우리가 2-3으로 패했기에 분노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미르는 내 동생이다. 친구 훨씬 이상의 존재였는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오, 시세 좀 봐. 시티 팬인가’ 같은 말이 있었다. 거기에 사미르가 없었다면 난 그냥 샤워하러 갔을 거다. 물론 우리도 잔류했다! 어쨌든 한 시즌 더, 아닌가. QPR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찾긴 어렵다. 팀에서 보유한 매우 좋은 선수들이 모두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한 좋은 팀이었고, 그들의 유니폼을 입은 일원이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

디제잉에 관한 당신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됐나?

카타르, 러시아, 스위스의 몇 팀을 거친 후 선수 생활을 끝냈다. 늘 디제잉을 좋아했기에 그에 집중했다. 음악은 내 인생에서 늘 큰 부분이다. 내가 뛸 때는 음악이 날 자극했다. 우리가 헤드폰을 끼고 있을 땐 동료들이 내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모두를 위한 선곡은 아니었을지도! 우리 모두 취향은 다르니까. 지금 나는 음악을 녹음해 발표하고 있다. 최근에는 DJ피트와 ‘Kiti’라는 곡을 발표했다. 만약 하우스 뮤직에 빠져있다면 분명히 듣게 될 거다. 요즘 나는 뮤지션에 훨씬 가깝다.

리그앙 100골에 도전하고 싶다고 한 게 사실인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사실이다. 99골인 게 신경 쓰여서 그렇다. 나는 충분히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될 게 뭔가?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writer

by 조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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