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interview] ‘유리몸’ 우드게이트의 후회 “내 잘못이로소이다”

기사작성 : 2021-01-29 17:19

- 유리몸의 대명사가 말하는 부상…
- 우드게이트가 선수 커리어를 돌아본다
- 레알 생활이 참사…는 아니다?!

본문


[포포투=Ian Murtagh, 에디터=조형애]

전 리즈유나이티드 센터백 조나단 우드게이트는 베르나베우에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를 더 괴롭힌 건 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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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빅클럽 몇몇, 그리고 레알마드리드에서 뛰었다. 커리어를 세 단어로 요약한다면?

난 ‘정직’하고 ‘열정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떠오르는 한 단어는 ‘충족되지 않은’이라는 것이다.

성취하지 못했다는 감정이 오늘날까지 계속 당신을 괴롭게 하나?

물론이다. 부상이 아니었다면, 내 커리어는 아주 많이 달라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난 내 경기 기록들을 보고서 비슷한 나이대 선수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500경기 이상 뛴 선수들과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 잘못이 많았다. 늘 부상에서 급히 돌아오곤 했다.

자책하는 건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 (경기에서 부상으로) 나가게 되면, 혼자 생각한다. ‘감독님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경기하기 싫다고 생각할까? 내가 나약하다고?’ (다치게 되면) 피치 위에 가능한 한 빨리 복귀하고 싶은 게 본능이고, 대부분의 경우엔 그게 너무 이르다. 동시에 진단도 살펴봐야 하는데 말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한 달 후에 복귀할 것’이라고 하면 그 조언을 받아들어야 한다.

건강할 때 멋진 시간들을 보냈다. 특히 리즈에서 그랬다. 그때가 가장 즐거웠나?

리즈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리즈는 내가 가장 일체감을 느끼는 클럽이다. 내가 뛴 모든 구단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리즈에 있었던 그 기간은 특별했다. 우린 UEFA컵과 챔피언스리그에서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리그 우승을 놓고 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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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리즈 선수단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정리되기 전까지는…

우린 18세, 19세, 20세였고 주중, 주말 경기를 뛰었다. 실력이 향상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중 상당수의 선수는 10대에 이미 국가대표 선수였다. 나, 개리 켈리, 이언 허트, 해리 키웰 등이다. 리오 퍼디낸드, 로비 킨, 마이클 브리지스, 도미니크 마테오, 그리고 로비 파울러도 전성기를 앞두고 팀에 합류했다. 브리지스는 부상에 관한 한 나보다 더 불행한 선수였다. 선덜랜드에 합류한 그는 데뷔 시즌에 20골을 터트렸다. 난 그가 건강하기만 했다면, 2002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공격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로코모티브모스크바를 상대로 한 UEFA컵이 기억나는데, 맹세컨대 브리지스는 내가 본 9번 선수 중 최고의 경기력을 보였다.

몇몇 챔피언스리그 빅매치에 출전했다. 하지만 빅매치들을 놓치기도 했다. 리 보이어도 관련된 악명 높은 법정 사건 때문이었는데…

앨런드로드에서 열린 바르셀로나와 경기에서 1-1로 비긴 게 기억난다. 바비 롭슨 경이 후에 이런 말을 내게 하더라. 그날 밤 히바우두를 상대로 한 내 경기력이 후에 나와 계약하는 데 확신을 주었다고 말이다. 클럽에는 멋진 시기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뒤섞인 시기였다. 인생을 살며 겪는 모든 일들은 개개인을 강하게 만들고, 교훈을 준다. 때로는 그게 혹독한 교훈일 때도 있다.

롭슨과 2003년 계약해, 뉴캐슬에 입단하게 되었다. 진짜 원한 건 리즈 잔류였나?

리즈는 앞선 여름에 리오(퍼디낸드)를 맨체스터유나이이드에 팔았다. 그러고 나서 데이비드 오리어리가 떠났고, 테리 베너블스가 감독직을 이어 받았다. 그는 환상적인 지도자였고, 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지만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았다. 나도 떠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팠지만, 리즈는 돈이 필요했고 난 가야만 했다. 뉴캐슬에서 난 즐겼다. 바비 경과 괜찮은 축구도 했다. 하지만 리즈를 떠난 건 진정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1년 뒤, 레알마드리드와 계약했는데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렸다. 마침내 나선 데뷔전에서 득점을 올렸으나 퇴장당했다. 어떻게 그 재앙을 견딘 건가?

우리가 그날 경기에서 이긴 건 확실히 도움이 됐다!(웃음) 하지만 진지하게 말하면, 난 그 1년 동안 정신적으로 강해졌다. 경기가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경기장에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 아주 멋진 일이었다. 몸을 만들기 위해 힘든 날들을 견뎠다. 요즘엔 난 정신 건강에 관심이 아주 많다. 하지만 15년 전엔 아무도 내게 정신 건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수들이 우울증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건, 그게 나약함의 사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당시 우울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난 긍정적인 사람이다. 내 목표는 이거였다. ‘난, 이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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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서 보낸 시간은 어떻게 생각하나? 가끔 참사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가?

절대 아니다. 스포츠 선수로서 성공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보람이 있었다. 물론 몇 경기를 더 뛰고 싶었으나 레알은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이었다. 호나우두, 호베르투 카를로스, 데이비드 베컴, 미첼 살가도가 동료였다. 그들은 스타플레이어였지만 겸손했다.

레알마드리드에서 미들즈브러로 임대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하겠지만,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 않나?

실추가 아니다. 난 평생의 야망을 그곳에서 성취했다. 난 어릴 적 아이레섬파크(*리버사이드스타디움 개장 전까지 미들즈브러의 홈구장)에 가곤 했다. 난 보로 유니폼을 입는 날을 꿈꿨다. 하지만 완전 이적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임대 1년 후에 다시 레알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들은 내게 새로운 클럽을 찾으라고 한 적이 없다. 보로에서 좋았으나, 레알을 너무 일찍 떠난 건 내 축구 인생 가장 큰 후회다.

2008년 리그컵 결승전에서 토트넘을 우승으로 이끄는 결승골을 넣었다. 커리어의 하이라이트인가?

물론이다. 그 골로 어떤 어워즈에서도 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을 봤을 때 그건 온 세상이 내게 오는 것과 같은 득점이었다. 레알의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이 얼마나 기뻤는지 알려주려고 내게 문자를 보낸 게 기억난다!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1999년에 첫 경기를 치렀고 2008년에 마지막 경기를 뛰었다. 그런데 총 8경기 밖에 뛰지 못했는데…

불가리아를 상대로 데뷔한 뒤에 사람들은 내가 훌륭한 국가대표 커리어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잉글랜드 대표팀 생활은 너무도 성취감을 주지 못한 것이라 말할 가치가 없다. 또 그런 말이 있다. 1경기를 뛰면 100경기를 원하게 된다는 말. 난 그렇게 되진 못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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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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